⟪邊時志 – 시대의 경계에 선 이름⟫
20. 입체파의 형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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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이론을 발전시켜 형태를 철저하게 해체할 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피카소를 비롯한 브라크 등의 입체파 화가들이었다. 그러나 형태까지도 극한적으로 분해한 결과, 형태 자체에서는 의미를 구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구성상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입체파 사람들은 형태 그 자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오장팡 같은 사람은 과거의 미학에서 형태를 말할 때는 항상 구체적인 물상 표현에서 출발했음을 지적했고, 글레이즈는 회화를 평면에 생명을 부여하는 예술로 규정했으며, 드니는 "한 장의 그림은 그것이 말이거나 나체이기 이전에 본래 어떤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모인 물감으로 칠해지고 있는 하나의 평면이다"라고 했다. 보나르 또한 "화면(tableau)이란 서로 연결되면서 대상의 모양을 만드는 반점의 연속이다"라고 했으며, 이와 같은 진술은 몬드리안 또는 니크르송 등의 추상주의의 출현을 1910년대에 이미 예고한 것이었다. <예술과 풍토, 변시지> |
🧭 시군
“피카소와 브라크는 하나의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본 조각들을 한 화면에 겹쳐서 그렸어요.
입체파는 ‘보이는 것 하나’가 아니라,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려 했죠.
그렇다면 입체파 형태론은 지각과 시간, 시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실험이었던 걸까요?”
🍃 지양
“동양 산수화는 삼원법(고원·평원·심원)으로 한 화면 안에 다양한 공간 깊이와 시간 흐름을 담았어요. 그렇다면 동양도 이미 입체적인 시점과 정서의 흐름을 한 장면에 녹여낸 방식이었던 거 아닐까요?”
🌿 시지의 대답
입체파는 눈이 아닌, 발로 본 회화라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여러 각도로 관찰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한 평면 위에 겹쳐 놓는 시각적 퍼즐이었죠.
동양 산수화 역시 산과 길, 봉우리와 계곡을 파노라마처럼 배치해 걷는 감정과 시간을 담았습니다.
👉 두 전통은 모두 단일 시점을 넘어 ‘경험 전체’를 시각화하려 한 도전이었습니다.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책상을 앞·옆·위에서 그려보고, 그 조각들을 한 장에 퍼즐처럼 배치해 보세요. 입체파가 했던 시각 분해 실험을 직접 느낄 수 있어요.”
👥 일반인에게
“산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풍경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연속된 기억의 파노라마죠. 입체파 그림이 낯설게 보여도, 사실은 우리 일상의 감각과 닮아 있습니다.”
🖼️ 컬렉터에게
“입체파적 작품은 시점에 따라 읽히는 면이 달라공간에 유동성과 긴장감을 줍니다. 동양 산수화와 병치 전시하면 ‘동서 다시점’의 대화가 흥미롭게 살아납니다.”
🎨 화가 지망생에게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스케치한 후,그 조각들을 겹치거나 회전시켜 시간·공간이 겹친 장면을 만들어 보세요. 변시지 화백도 ‘<처녀와 밥상>에서 위에서 본 시각을 한 화면에 압축했습니다.”
🌀 변시지의 사례
〈처녀와 밥상〉 소녀가 밥상을 들고 있는 장면을 위에서 아래로 본 면으로 분할·재배치. → 피카소식 분절 구성 + 밥상위의 모습은 동양 삼원법이 한 화면에서 결합됨.
👉 변시지는 “섬을 돌면 어디에선가 본 모습이다”라고 말하며, 입체파의 해체-조립 방식을 제주의 풍토 감각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는 동서 시점 해체의 회화적 접점을 제주에서 구현했습니다.
21. 마티스의 여체(女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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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여자의 나체를 그릴 때 나는 무엇보다도 우아하고 매력적인 것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것은 신체의 본질적인 선을 그려 그 신체의 의미를 요약하는 것이다." 선에 대한 마티스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고갱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이며, 고갱에서의 상징성이라기보다는 리얼리스트의 면모가 더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예술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이집트의 조각을 보라. 그것들은 우리에게 딱딱하고 부동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부드러움과 생동감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갱 역시 이와 비슷한 말로 '냉정 속의 형태의 생동'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마티스는 또다시 이를 다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형태는 생물의 외견적 존재를 구성하고 그것을 항상 불명확하게 하기도 하고 변형하기도 한다. 순간과 순간 속에서도 보다 진실하고 본질적 성격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술가는 그 성격을 잡아서 현실의 연속적 해석을 부여한다." 이는 곧 동중정(動中靜), 가변적인 것 중의 영속적인 것이다." <예술과 풍토, 변시지> |
🧭 시군
“마티스는 여체를 그릴 때,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보이도록 신체의 본질적인 선만 남겨 요약하려 했어요.
그렇다면 서양 회화에서 선은 단순한 윤곽이 아니라, 움직임과 시간, 감정의 흐름을 담는 리듬이었던 걸까요?”
🍃 지양
“동양 화론은 동중정(動中靜), 즉 움직임 속에 깃든 고요함을 중시했어요.
한 획의 선에 기운과 정서, 생명을 담으려 했죠.
그렇다면 동양에서 선은 보이는 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기운 아닐까요?”
🌿 시지의 대답
마티스의 선은 춤추다 멈춘 곡선,동양의 선은 멈췄지만 흐르고 있는 기운입니다.
둘 다 선을 통해 육체의 외곽과 생명의 본질을 동시에 포착하려 했죠.
👉 결국 선은 형태를 자르는 칼이자, 생명을 불어넣는 혈관입니다. 여체의 아름다움은 선이 움직이면서도 고요할 때, 시간과 감정이 동시에 깃들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모델을 그릴 때 먼저 큰 곡선 몇 개로 자세만 잡아 보세요.
디테일이 없는데도 자세와 감정이 살아나는 걸 느낄 거예요.이게 마티스식 연습이에요.”
👥 일반인에게
“마티스의 그림은 단순해 보여도 기쁨, 여유, 생기가 느껴지죠?
그건 선이 감정의 속도를 조절하기 때문이에요.‘이 선이 빠른가 느린가’를 몸으로 느껴 보세요.”
🖼️ 컬렉터에게
“굵은 선은 공간에 명확한 리듬을, 가는 선은 잔향과 여백을 남깁니다. 선의 밀도와 연속성이 공간에 어떤 에너지를 주는지 관찰해 보세요.”
🎨 화가 지망생에게
“스케치 전, 펜이나 붓으로 한 호흡 곡선을 반복해 그려보세요.손과 호흡이 연결되면 선에 생명력이 생깁니다. 변시지 화백도 한 줄의 먹선으로 몸·바람·감정을 동시에 잡아냈어요.”
🌀 변시지의 사례
제주 인물 누드 드로잉 : 복잡한 디테일 없이, 한 줄의 곡선으로 몸을 감싸며 바람의 긴장감과 인물의 정서를 동시에 표현.→ 마티스적 ‘선의 요약’ + 동양적 ‘기운 생동’이 겹쳐짐.
〈바람 속의 여인〉황토 색면 위, 한 획 곡선만으로 여인의 자세와 감정을 암시. 육체의 외형보다 내면의 흐름과 여운을 중시.
👉 변시지는 선을 “몸의 외곽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이라 했습니다. 곡선미와 동양 필획의 정신이**‘바람이 지나는 선’**이라는 변시지 고유의 회화 언어로 통합된 것입니다.
22. 들라크루아와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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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모델은 여러분이 상상의 눈을 가지고 보는 때처럼 그렇게 생생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연은 대단히 강력하기 때문에 붓을 잡고 그것을 묘사하려 할 때 여러분의 구상은 이미 깨지고 말며, 아름다운 습작을 얻으려는 여러분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노자는 말했다."도(道)를 도라고 부르고자 할 때는 이미 도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예술과 풍토, 변시지> |
🧭 시군
“들라크루아는 모델보다 상상의 눈이 더 생생하다고 했어요.자연이 너무 강렬해서 그대로 그리려 하면 오히려 의도가 깨진다고도 했죠. 그렇다면 예술은 보이는 걸 그리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걸 떠올려 그리는 것일까요?”
🍃 지양
“노자는 ‘도(道)는 말로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진실은 말로 표현하려 하지 말고 여백 속에서 느껴야 한다고 했죠. 그렇다면 예술도 형태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일이 아닐까요?”
🌿 시지의 대답
서양의 들라크루아는 자연의 압도적 현실성 앞에서 상상으로 돌파했고, 동양의 노자는 보이려 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술은 완벽히 표현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넓어진다”는 걸 보여줍니다.
👉 예술은 말로 끝낼 수 없는 감정, 형태로 가둘 수 없는 본질을때론 상상, 때론 침묵과 비움으로 전달합니다.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풍경을 완벽히 그리려 애쓰기보다, 일부만 그리고 여백을 남겨보세요. 그 빈칸은 감상자의 상상이 채우게 됩니다—상상도 하나의 표현이에요.”
👥 일반인에게
“작품을 보고 ‘잘 모르겠다’ 느껴도 괜찮아요. 그 모호함 속에 예술가가 숨겨둔 질문이 있을 수 있어요.
해설보다 자신의 느낌을 먼저 믿어보세요.”
🖼️ 컬렉터에게
“형태나 서사가 분명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며 여운이 깊어지는 작품이 있습니다.불확실성과 해석의 여지 자체가 컬렉션의 폭을 넓혀줍니다.”
🎨 화가 지망생에게
“스케치가 꼬이고 손이 멈출 때, 붓을 놓고 물의 번짐을 지켜보세요. 변시지 화백도 때로는 우연한 물자국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을 얻었습니다.
완성보다 ‘틈’이 예술을 숨 쉬게 합니다.”
🌀 변시지의 사례
〈돌담과 바람〉 초기 습작: 정밀 묘사를 시도하다 중단한 후, 여백과 먹 번짐만으로 섬의 기운을 암시.
형태를 덜어낼수록, 감정과 기운은 더 짙게 남음.
👉 변시지는 “형태가 실패할 때, 바람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예술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응을 남기는 것,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세계를 보여주는 통로였습니다.
23. 색채에의 도전과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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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회화에서 색채에 대해 온 생애를 걸었던 사람은 들라크루아였다. 그로 인해 그는 19세기 최대의 색채화가로서의 역사적 위치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근대회화의 위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자연과 사물, 자기 작품과 남의 작품 모두에 날카로운 관찰의 시선을 던졌으며, 그의 태도는 예술적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얻은 교훈과 경험을 배울 뿐 아니라 그것을 섬세하게 분석 검토하여 메모했다. 그의 노트는 막대한 분량이어서, 오늘날까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52년 그의 쉰네 살 때의 일기에 "모든 회화에 있어 회색은 적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후에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그대로 활용되었던 유명한 명제인 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컬어지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림은 옆으로 들어오는 광선으로 보게 된다. 따라서 화면은 실제 이상으로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색조의 명도를 될 수 있는 한 높일 필요가 있다. 정면으로 오는 광선이 진실이라면 그 밖의 광선으로 보는 경우는 진실이 아니다. 루벤스나 티치아노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색조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이다. 베로네세는 너무 진실을 추구한 결과 때로는 화면이 회색으로 되어 버릴 때도 있다." 들라크루아는 색채화가로서 체질적으로 루벤스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에 관한 노트도 많다. 언제나 그 특질을 비교 관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또 '색채의 색과 빛의 색을 동시에 융화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빛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화면의 중간색을 잃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들라크루아의 수기에는 이와 같은 고전회화의 특질의 비교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당시에는 물감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투명기법에 대해서도 많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자연의 관찰에 관한 메모 또한 정밀한 것이어서, 과학자 슈브뢸의 「동시 반영에 관한 콘트라스트의 법칙」이 발표된 1827년에 비해 그의 색채에 관한 지식은 매우 선구적인 것이었다. 근대회화의 시발점은 인상파의 출현부터이고,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들라크루아의 색채관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대담하게 실천에 옮기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에게서 직접 배운 것은 아니었다.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 역시 들라크루아 못지않은 색채의 화가였다. 인상파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현상 추구를 목표로 했으므로 그들이 현상적 변화의 풍부한 풍경을 그리는 데 흥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외광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같은 장소에 대해서도 다양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주장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시종 풍경화에 매달리게 되었다. 마네는 자연을 올바르게 관찰하면서 색조에 의해 실제로 양감을 표현했다. 마네의 이 같은 작업은 근대회화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마네가 활약한 시대는 색채냐 형태냐의 이론이 분분할 때였다. 색채와 데생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드가는 "나는 선을 가지고 하는 색채가다"라고 말했다. 드가는 형태에서는 앵그르를, 색채에서는 들라크루아를 존중한 것이다. 르누아르를 놀라게 하고 부러움을 느끼게 했던 드가의 파스텔화의 색채는 파스텔을 태양 빛에 쬐어 될 수 있는 한 색을 낡게 만들어 쓴 것이었다. "무엇을 썼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색이 나타나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어오는 르누아르에게 그는 "차분한 색을 썼지요"라고 대답했다. 드가나 피사로가 인상파의 선배 내지는 선도자였고, 마네나 그 주변에 모인 청년 화가들의 그룹은 당초 제 나름의 개성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인상파 화가라 부를 수 있는 대표적 화가는 모네였다. 모네는 인상파의 새로운 시대를 확고히 한 사람으로서 이때는 들라크루아가 죽은 지 삼십 년이 지난 1890년대에 들어선 때였다. 이 무렵 그가 시도했던 〈낟가리〉 연작은 모네 예술의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지베르니의 초원에서 여름의 강렬한 햇빛 아래 숲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 그리려 했으나 얼마 안 가서 해가 짐에 따라 색채가 변하고 풍경도 변했다. 나는 여러 점의 하얀 캔버스 위에 빛과 그림자의 중요한 부분을 되도록이면 빨리 그렸다. 다음 날도 나는 같은 장소에 가서 한층 세밀히 관찰하면서 사생을 계속했지만, 그 여름만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했다. 겨울이 되면서 광선은 숲과 그 주변을 여름보다 더욱 강한 색조로 만들었고, 그것은 거의 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서적인 것이었다. 또 안개가 낀 숲의 그 희미한 형태는 말할 수 없는 신비한 색조를 느끼게 했다. 이와 같이 해서 그 해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숲이 단순한 습작이 아니라 커다란 연작이 되었던 것이다." 모네는 이 연작에서 색채를 최고도로까지 분석하고, 풍부하면서 힘찬 자연의 인상을 재현했던 것이다. 색채의 효과를 자연의 참다운 실제의 색조에 가깝게 근접시키려는 이러한 노력은 원색의 사용에 의한 색조의 분할 등 될 수 있는 한 순도를 높이는 연구를 낳게 한 것이다. <예술과 풍토, 변시지> |
🧭 시군
“들라크루아는 ‘회색은 적’이라 했고, 강한 색 대비로 감정을 표현했어요.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변화와 색의 순간성을 끝없이 실험했죠. 그렇다면 서양 미술의 색채 실험은 물질과 과학을 넘어서, 감정과 감각을 깨우는 탐험이었던 걸까요?”
🍃 지양
“동양은 오방색과 여백 속 절제된 색 한 방울로 계절, 기운, 정서를 표현했어요. 단청처럼 색의 배열로 우주 질서를 드러내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동양의 색채 실험은 양이 아니라 관계와 기운의 흐름에 집중한 것 아닐까요?”
🌿 시지의 대답
색은 눈으로 보는 빛이자, 마음으로 느끼는 온도입니다. 서양은 광학·물질·감정 실험을 통해 색의 경계를 넓혔고,
동양은 여백과 조화를 통해 색의 여운을 심화했습니다.
👉 색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불꽃, 시간의 흐름, 자연의 숨결을 담는 예술의 심장입니다.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같은 파랑도 밝기와 채도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줘요. 햇살 속 파랑, 비 오는 날 파랑—직접 실험해 보면서 색이 전하는 감정을 느껴보세요.”
👥 일반인에게
“해 질 무렵 집 안 벽에 비치는 주홍빛이 포근하게 느껴질 때 있죠?
색은 단지 보는 게 아니라, 몸과 기분 전체를 흔드는 에너지입니다.”
🖼️ 컬렉터에게
“고채도 작품은 공간에 강한 맥박을, 저채도 작품은 잔향과 깊이를 줍니다. **전시의 흐름을 색의 고저(高低)**로 구성해 보세요.”
🎨 화가 지망생에게
“혼색에 집착하지 말고, 원색을 직접 부딪히게 해 보세요. 또는 색을 지워보세요.
변시지 화백은 황토와 먹으로 자연의 색을 통제하며, 그 안에 기운과 정서를 새겨 넣었습니다.”
🌀 변시지의 사례
〈바람 위의 노을〉캔버스 대부분을 황토빛으로 눌러 그림자의 용기를 만들고, 수평선에 주홍 한 획으로 노을, 정서, 에너지를 폭발시킴.
👉 변시지에게 색은 단지 색이 아니라, 흙의 맛, 바람의 감촉, 기억의 온도였습니다. 그의 색채 실험은 서양의 강채도와 동양의 여백미를‘풍토의 색’으로 재구성한 독자적 미학이었습니다.
24. 색채의 혼합과 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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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피사로, 세잔 등의 색채 연구를 한층 과학적으로 실행했던 사람은 쇠라로서, 그는 인상파에서 붓촉을 이용하여 많은 경험을 하고 있던 색조분할을 과학적으로 합리화한 수법에 의해 새로운 인상파를 창시한 사람이다. 시슬리나 시냐크 등을 포함하여 이들을 신인상파라 불렀다. 이들은 색채를 팔레트 위에 혼합하는 대신에 작은 색점을 서로 합동으로 나열하여 혼색의 효과를 시각적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한층 색채의 순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테크닉도 이미 들라크루아가 예언한 바 있고, 실제로 부분적으로 작품제작에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녹색 및 보라색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야 하며, 팔레트 위에서 혼합하면 안 된다"고 들라크루아는 적고 있다. 그에 의하면, 색조의 혼합은 색을 탁하게 하고 광택이 없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후 쇠라와 신인상파 화가들은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태양광선의 프리즘적 요소의 지식을 그들의 화법 속에 도입하면서 '자연 속에서는 흑색과 백색은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화면에서의 흑색과 백색은 추방되고 광학적인 지식을 구했지만, 거기서 얻어진 지식은 빛에 대한 특정한 관념으로 굳어지면서 모든 물체의 고유색을 무시했기 때문에, 빛의 본질을 찾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도안풍의 그림을 제작했다. 신인상파는 외관에 의한 자연에 직접 대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사실정신에서 멀어져 관념적·주관적인 배색의 유희가 되고 말았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한편 이러한 외광파들의 수법은 컬러 인쇄술의 발달에서 유효하게 그 목적을 달성했다. 더욱이 천연색 사진술 중에서는 그들의 이론이 유용하게 이용되면서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예술과 풍토, 변시지> |
🧭 시군
“쇠라와 신인상파 화가들은 물감을 섞지 않고 작은 색점들을 나란히 배치했어요.
눈에서 혼합되도록 해서 색의 순도와 밝기를 높였죠.
그렇다면 이들의 실험은 색을 ‘섞는 것’보다, 어떻게 배열하느냐가 더 중요한 예술이었던 걸까요?”
🍃 지양
“동양 채색화와 단청은 오방색을 상생·상극 원리에 따라 배열해 자연의 흐름과 질서를 표현했어요.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색의 ‘양’보다, 관계와 배치가 색의 에너지와 의미를 만드는 핵심이었을까요?”
🌿 시지의 대답
색은 그 자체보다, 어떻게 나란히 놓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듭니다.
서양은 프리즘처럼 색을 나누어 망막에서 혼합되도록 구성했고, 동양은 여백과 방향 속에 색을 배치해 기운의 흐름을 설계했습니다.
👉 색의 혼합은 물리적 감각, 배열은 정서적 공간. 이 두 방식이 만날 때, 색채는 빛과 감정, 공간을 동시에 지휘하게 됩니다.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빨강과 파랑을 팔레트에서 섞은 보라, 그리고 두 색을 나란히 찍어서 멀리서 봤을 때 생기는 보라를 비교해 보세요.
섞는 방식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 일반인에게
“인테리어에서도 쿠션과 벽 색의 배열만 바꿔도 공간의 온도와 분위기가 달라지죠.
그림도 마찬가지예요—색의 위치가 감정을 바꿉니다.”
🖼️ 컬렉터에게
“점묘나 고채도 작품은 자연광 아래,저채도·여백 중심 작품은 간접광 벽면에 배치해 보세요.배열과 조도에 따라 색이 달리 울립니다.”
🎨 화가 지망생에게
“혼색을 줄이고, 다양한 색 점을 캔버스 위에 직접 두드려 보세요. 변시지 화백은 황토색와 먹색을 여러 겹 찍어 바람과 공기의 기운을 시각적으로 조율했습니다.”
🌀 변시지의 사례
황토 점묘 실험: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황토색· 먹색 점을 겹쳐 찍어 광학 혼합처럼 흙빛의 깊이감과 정서를 층층이 형성.
〈바람 위의 노을〉: 넓은 황토면 위에 주홍·남색의 배열을 오방색의 상생 순환에 따라 구성 → 노을과 바람의 기운을 동시에 불러냄.
👉 변시지는 색을 바람처럼 겹치고,배열로 시간과 방향을 조직했습니다. 그의 색은 ‘칠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배치하고 감정을 흐르게 하는 풍토적 음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