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邊時志 – 시대의 경계에 선 이름⟫
35. 작품을 아는 것과 맛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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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미술관이 많이 늘어나고 전시회가 많아져서 감상자들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과거와는 달리 수많은 개인전, 그룹전, 교류전, 초대전, 공모전 따위의 전시회가 열리고, 각 대학마다 예술계열의 학과가 늘어나 미술을 공부할 기회도 많아졌다. 또한 후원회나 공공기관의 지원으로 첨단시설을 자랑하는 전시공간이나 예술공연장도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전시회가 많아졌다는 것과 그것을 감상하는 일 사이에는 늘 그렇게 화해로운 관계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작품을 자주 대할 수 있어서 좋지만 너무 자주 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쉽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감상의 기회가 너무 쉽게 주어지기 때문인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소 반복적이거나 습관적인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작가의 정열과 고뇌와 정신의 산물인 작품은 아무래도 힘들게, 고심하면서, 그리고 생각하면서 즐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감상이다. 출판인쇄가 발달하고 전시의 기회가 많아져 고금의 작품들을 다시 접할 수 있고 그에 관한 이론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과 무엇을 '맛본다'고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이해하기 이전에 무엇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내용을 의식하기 전에 거기에 감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미술작품의 감상은 감상자의 순수하고 선입견 없는 마음의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식이나 편견은 작품을 올바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상을 탄 작품이나 이름난 작가의 작품에만 매달리거나 팸플릿에 인쇄된 평론가의 해설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는 작품을 주체적으로 보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미적 감동이란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직접 그 회화나 조각의 기법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가끔 쿠르베나 세잔의 그림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니콜라 드 스탈 또는 몬드리안의 그림은 모르겠다고 하는 감상자가 있다. 사람들은 동물이나 산이나 사과가 그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회화적 언어, 즉 선이나 형태나 색으로 전달받는 데서 기쁨의 의미나 정서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구체적으로 산이나 사과가 그려져 있지 않은 선이나 색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이미지나 형태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음과 음의 조화를 거부하고 음악이 성립할 수 없듯이, 회화의 방법은 선·면·색채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몬드리안의 그림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림 속에서 회화 이외의 요소와 관련지어 연상하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회화는 그 화면 속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보다는 어떻게 회화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작품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무엇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미지가 가미되어, 색채나 선만으로 할 수 없는 구성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예술과 풍토, 변시지> |
🧭 시군
“듀이는 예술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경험해야 한다’고 했어요. 작품을 머리로 분석하기보다, 몸과 감각으로 맛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미술 감상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걸까요?”
🍃 지양
“차를 마실 때처럼, 동양에서는 작품도 천천히 음미하는 감흥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렇다면 예술 감상도 해설보다 느낌과 여백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먼저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 시지의 대답
예술은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먼저 보고, 느끼고, 반응해야 그 다음에 이해가 따라옵니다.
지식은 해석의 틀이고, 감동은 울림의 시작입니다.
👉 작품을 본다는 건, 맛보는 일입니다—감각과 마음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체험.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해설지 없이 작품 앞에 서서, 떠오른 감정을 먼저 써보세요. 느낀 후 아는 것이 더 오래 남습니다.”
👥 일반인에게
“작품 앞에서 ‘잘 모르겠다’는 감정도 괜찮아요. 이해보다 울림이 먼저일 수 있어요.”
🖼️ 컬렉터에게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며,눈뿐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작품의 온도를 느껴보세요. 그것이 진짜 수집의 시작입니다.”
🎨 화가에게
“작업 전에 좋아하는 그림 한 점을 차를 마시며 조용히 바라보세요. 눈, 호흡, 감정이 깨어날 거예요.”
🌀 변시지의 사례
변시지는 “예술은 머리보다 몸으로, 해설보다 여운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감상은 기억보다 경험, 아는 것보다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정기(GHQ)가 일본 미술계에 미친 영향과
변시지 작가의 제도권 성공에 대한 심층 분석
1945–1949년 GHQ/SCAP의 문화정책과 검열, 전후 아카데미즘(광풍회·Nitten)과 아방가르드의 이중 구조, 데라우치 만지로 계보, 그리고 변시지의 <광풍상> 수상과 최연소 회원 등극을 입체적으로 해석한다.
서론: 전후 일본의 문화적 지형과 GHQ의 개입
1945년 종전 이후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부(GHQ/SCAP)의 통치 하에 놓였고, 이는 사회 전 영역에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다1. GHQ의 목표는 군국주의 해체를 넘어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재교육(Reorientation)하는 것이었으며1, 그 영향은 순수 예술 분야까지 깊숙이 미쳤다. 본 문서는 1945–1949년 GHQ의 문화적 개입이 서양화(洋畫, Yōga) 학계에 미친 변화를 분석하며, 같은 시기 데라우치 만지로 문하의 한국인 화가 변시지가 광풍회 최고상인 광풍상(光風賞)을 수상하고 최연소 회원으로 등극한 현상을 제도적 맥락에서 심층 검토한다.
I. GHQ 점령과 일본 문화적 ‘재교육’ (1945–1948)
I.A SCAP의 점령 목표 및 문화 통제 기구
맥아더 원수는 SCAP 지령(SCAPIN)을 통해 군국주의적 민족주의를 억압하고2 일본 사회의 근본 개혁을 추진했다1. 1945년 10월 4일 발표된 SCAPIN-93(‘인권 지령’)은 언론·시민·종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사상통제법과 치안유지법의 폐지를 명했다4. 이로써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미술계 역시 전시 동원과 이데올로기 종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압박을 받았다.
I.B 문화적 자유화와 검열의 역설
자유화에도 불구하고 GHQ는 점령 기간(1945–1952) 내내 언론·출판을 검열했다5. 즉, 제국의 검열은 GHQ의 검열로 대체되었고, 미술계는 ‘탈군국화’와 ‘민주화’의 명분 아래 제도적 변신을 입증해야 했다.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반성과 전통 권위 비판, 아방가르드의 대두가 동시에 일어났고6제도권은 이에 대응하는 상징을 필요로 했다.
I.B.1 제도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상징적 갱신’
광풍회와 같은 기관은 Bunten/Teiten 계열과 연결된 아카데미즘의 연속선 위에 있었기에, GHQ의 암묵적 승인과 사회적 정당성을 위해 민주적이고 능력 중심의 개혁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었다. 1948년 젊고 비일본인인 변시지에게 최고상을 수여한 결정은 제도권의 민주화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작동했다.
I.B.2 아카데믹 리얼리즘의 ‘안전한’ 영역
정치적·외설적 내용에 대한 검열이 유지되는 가운데5, 아방가르드가 급진적 실험을 확장하던 시기6, 프랑스 외광파 전통에 뿌리 둔 인물·누드 중심의 아카데믹 서양화는 ‘문화적으로 안전한’ 영역으로 간주되었다9. 변시지가 광풍회라는 플랫폼을 택한 배경에는 이 같은 제도적 맥락이 놓여 있다.
II. 일본 아카데미즘 미술의 제도적 지형
II.A 전후 미술계의 이중 구조
전후 일본 미술은 아방가르드의 비판적 실험(하세가와 사부로, 이세이 노구치 등)13과, 일전(Nitten)·광풍회로 대표되는 제도권의 지속이라는 이중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1954년 구타이의 등장으로 반(反)예술적 경향은 더욱 과감해졌다14. 반면 데라우치 만지로를 중심으로 한 광풍회는 심사·행정의 중추에 자리했다10.
II.B 데라우치 만지로의 계보
데라우치는 구로다 세이키에게서 외광파와 누드 전통을 계승했고10, 12, 제국미전 특선과 광풍회 회원(1929)을 거쳐 전후에도 일본미술전(Nitten)의 요직을 맡았다11, 10.
II.B.1 외광파(Pleinairisme)의 유산
구로다는 프랑스 유학 시 라파엘 콜랭에게서 배운 외광파·누드를 도입해 일본에 정착시켰고 백마회를 창립했다12. 데라우치는 이를 일본 풍토에 맞게 인물·누드 회화로 전개했다8, 11.
II.B.2 공백기 속 ‘숙련도’의 가치 상승
전후 이데올로기 공백 속에서 표준화된 아카데믹 서양화의 기술적 숙련도는 심사의 객관 지표로 기능했다. 변시지가 단기간에 최고상을 거머쥔 사실은 그가 인물·누드 중심의 핵심 기술을 빠르게 정복했음을 시사한다.
II.C 데라우치 만지로 학파의 계보 및 특징
| 인물 | 주요 활동 시기 | 예술적 계보/스승 | 주요 화풍 특징 | Kōfūkai / Nitten 지위 |
|---|---|---|---|---|
| 구로다 세이키 | 1884–1924 | 라파엘 콜랭 (외광파)12 | 외광파, 일본 근대 누드 정착9 | 백마회 창립, 도쿄미술학교 교수12 |
| 데라우치 만지로 | 1890–1964 | 구로다 세이키10 | 인물·누드 전문, 아카데믹 리얼리즘8 | 광풍회 회원(1929), 日展 이사·평의원(1946 이후)10, 11 |
| 변시지 | 1945년 이후 도쿄 | 데라우치 만지로 문하12 | 초기 인물·풍경, Kōfūkai 아카데미즘 계승 | 광풍상(1948)·최연소 회원(1949)12 |
III. 변시지의 도쿄 활동과 1948년 ‘광풍상’
III.A 데라우치 문하 사사 (1945년 이후)
오사카 대학 졸업 후 변시지는 1945년 도쿄 아테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 데라우치 만지로를 만나 문하에 들었다12. 이케부쿠로 릿쿄대 인근 아틀리에촌 ‘파르테논’에서 모델을 주 단위로 계약해 인물 연구에 몰두했으며, 이는 데라우치의 핵심 학풍을 충실히 따른 집중 실습이었다12.
III.B 광풍회 데뷔 및 초기 성과 (1947–1948)
1947년 제33회 광풍회전에 첫 응모해 <겨울나무> A, B로 입선—사선의 빛과 겨울 분위기를 중시한 외광파적 풍경이었다12.
III.B.1 1948년 광풍상 수상의 쾌거
인물 연구작의 비중은 데라우치 학파 핵심 역량과 합치하며, 기술적 정점 도달을 심사에 입증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III.B.2 수상의 제도적 파급 효과
1949년 긴자 시세이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같은 해 광풍회 최연소 회원으로 위촉되며 제도권 내 지위를 확고히 했다12.
| 연도 | 활동 내용 | 주요 작품 | 연령 | 의미·파급 효과 |
|---|---|---|---|---|
| 1947 | 광풍회 제33회전 입선 | <겨울나무> A, B12 | 22세 | 외광파적 풍경으로 학풍에 순응 |
| 1948 | 제34회전 광풍상 수상 | 4점(인물·풍경)12 | 23세 | 최연소 수상, 전국적 명성 확립 |
| 1949 | 시세이도 화랑 개인전·최연소 회원 | — | 24세 | 제도권 위상 확립, 능력주의의 상징화 |
IV. GHQ 환경과 변시지 성공의 상호작용
IV.A GHQ 문화정책이 제공한 ‘기회’
SCAPIN-93 등 민주화 압력4은 권위 있는 예술기관으로 하여금 능력주의·국제주의 수용을 ‘결과’로 증명하도록 만들었다. 한국 출신의 젊은 화가가 순수한 기술적 완성도로 최고상을 받는 사건은 제도 개혁의 가시적 증거였다. 또한 점령기의 구조적 유연성은 입문 2년 만의 최고상·회원 등극이라는 ‘시간 압축’을 가능케 했다.
GHQ 문화정책의 목표와 미술계에 대한 간접 영향 (1945–1952)
| 정책 목표 | 주요 실행 | 미술계 영향 |
|---|---|---|
| 군국주의 청산·민주화 | 사상통제·치안유지법 폐지(Scapin-93)4 | 표현 자유의 이론적 확대, 제도권 ‘탈군국화’ 요구 |
| 교육·문화 재교육 | 책·교과서·영화·라디오 등 전 채널 활용3 | 가치 혼란과 전통 비판, 아방가르드 대두6 |
| 검열·통제 | 언론·출판 지속 검열5 | 정치 선전 배제, 아카데믹 서양화는 ‘안전 지대’ 유지9 |
IV.B 데라우치 화풍과 제도적 후원
직접 기록이 제한적이더라도12, 활동 양태로 볼 때 변시지는 인물·구상 능력을 완비했으며, 데라우치의 제도적 후원(광풍회 심사·Nitten 요직)은 최상위 진입의 핵심 통로였다10, 11. 아방가르드의 이념적 자유가 경제·제도 면에서 불안정했던 반면, 광풍회 경로는 개인전과 회원 자격이라는 안정된 경력을 제공했다.
V. 결론
GHQ 점령은 일본 사회의 광범위한 민주화·재교육을 강제하며, 전통 강자의 예술기관으로 하여금 능력주의와 국제적 포용을 ‘실행’으로 입증하게 했다. 변시지의 1948년 광풍상과 1949년 최연소 회원 등극은, 전후 이데올로기 혼란과 제도 개혁의 교차점에서 정통 아카데미즘을 통해 ‘민주적 능력주의’를 구현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는 개인의 천재성에 더해, 점령기가 만든 제도적 유연성과 데라우치 계보의 표준화된 숙련 체계가 결합되어 가능했던 독특한 성공 모델로 기록된다.
맨 위로 ↑참고 자료
- Occupation and Reconstruction of Japan, 1945–52 – U.S. Office of the Historian. 링크
-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 Wikipedia. 링크
-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The Far East, Vol. VIII (FRUS). 링크
- Modern Japan in Archives, “The Occupation and the Beginning of Reform”. 링크
- Library of Congress, Japanese Censorship Collection. 링크
- ArtCollection.io, “Japanese post-war avant-garde”. 링크
- Kyocera Museum (Kyoto), “Japanese Painting in Postwar Kyoto: The Avant-Garde Movement” (tentative). 링크
- Hiroshima Museum of Art, “TERAUCHI Manjiro”. 링크
- The Japan Times, “Undressing Paintings: Japanese Nudes 1880–1945”. 링크
- 이바라키현 근대미술관 소장품 검색, “寺内萬治郎”. 링크
- Tokyo Fuji Art Museum, “寺内萬治郎 | 작품을 알다”. 링크
- 제민일보, “아직도 제주그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링크
- Asian Art Museum, “Changing and Unchanging Things: Noguchi and Hasegawa”. 링크
- Gutai Art Association – Wikipedia. 링크
※ 본문 내 숫자 각주는 위 참고 자료의 번호와 연결됩니다.
폭풍의 연대기, 경계의 미학:
미술사적 맥락에서 본 변시지(邊時志) 예술 분석
구술 채록 자료, 저서 『예술과 풍토』, 비평 자료 등 방대한 문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결과, 화가 변시지(1926-2013)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동서양 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역적 특수성(Locality)을 보편적 예술 언어로 승화시킨 거장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예술적 궤적은 20세기 세계 미술사의 주요 화두인 모더니즘의 수용과 극복, 정체성 탐구, 그리고 실존주의적 성찰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1. 변시지의 예술적 궤적: 정체성을 향한 여정
변시지의 삶과 예술은 일본(오사카/도쿄), 서울, 제주라는 세 개의 시공간적 축을 따라 극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가. 도쿄 시기 (1940년대–1957): 서구 모더니즘의 습득과 이방인의 성공
6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변시지는 오사카미술학교와 데라우치 만지로(寺内萬治郎) 문하에서 서구식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였던 광풍회(光風會)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인상주의의 외광 효과를 일본식 아카데미즘과 결합한 양식이었습니다.
23세에 광풍회 최고상을 수상하며 기술적 완성을 인정받았으나, 이는 동시에 그에게 실존적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구술 채록에서 드러나듯, 이 시기는 '황금빛 족쇄'와 같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자신의 예술적 뿌리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꼈습니다. 이는 서구 모더니즘을 습득한 비서구권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모방과 독창성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나. 서울 시기 (1957–1975): 과도기적 모색과 선(線)의 자각
귀국 후 서울에서 변시지는 한국적 미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고궁 풍경에 천착하며 '비원파(秘苑派)'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는 여전히 서구적 기법으로 한국적 소재를 다루는 과도기였습니다. 동시에 구술 채록에서 언급된 정치적 감시와 화단의 냉대는 그를 고립시켰습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성과는 색채 중심의 서양화에서 벗어나 동양 미학의 근간인 '선(線)'의 중요성을 자각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선(線)은 색(色)을 버리는 데 있다"는 미학적 진리를 획득합니다. 이는 형태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다. 제주 시기 (1975–2013): 풍토(風土)와의 합일과 독창성의 완성
50세에 고향 제주로의 귀환은 그의 예술 인생에서 결정적인 혁명이었습니다. 그는 『예술과 풍토』에서 밝혔듯, 예술이 자신이 발 디딘 땅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주를 자신의 미학적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독창적인 '제주 화풍'이 완성됩니다.
- 황토빛(黃土色)의 미학: 그는 서양 유화의 다채로운 색을 버리고, 제주의 흙과 빛, 그리고 그 땅에 새겨진 삶의 애환을 상징하는 황토색을 주조색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색채 선택이 아니라, 풍토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시도였습니다.
- 검은 선(墨線)의 힘: 황토빛 화면 위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검은 선은 형태의 윤곽을 넘어, '바람'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시각화합니다. 이는 유화 물감의 물성을 변형시켜 동양화의 필선(筆線)과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구현한 혁신적인 성과입니다.
제주 시기의 작품 속 구부정한 노인, 왜소한 조랑말, 휘몰아치는 폭풍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 선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2. 세계 미술사적 맥락에서의 변시지
변시지의 예술은 세계 미술사의 다양한 흐름과 교차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합니다.
가. 실존주의 미학과 고독의 형상화
변시지의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황량한 풍경과 고독한 인물상은 전후(戰後) 세계 미술을 관통했던 실존주의(Existentialism) 미학과 깊이 공명합니다. 황토빛 대지 위를 지팡이에 의지해 홀로 걷는 노인의 모습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조각상처럼, 부조리한 세계 속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형상화합니다. 변시지는 제주의 풍경을 통해 외부 세계의 재현이 아닌, 인간 실존의 보편적 조건을 탐구했습니다.
나. 동서양 미학의 창조적 융합: 유화와 필선
변시지의 가장 중요한 미술사적 기여는 동서양 회화의 경계를 허문 독창적인 융합 방식에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서구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예: 프란츠 클라인, 마크 토비)은 동양의 서예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반면 변시지는 서양의 주재료인 유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물성을 변형시켜 동양화의 핵심인 필선의 미학과 정신성을 구현했습니다. 그의 검은 선은 형태의 윤곽선이 아니라, 기(氣)의 흐름 그 자체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이러한 융합을 추상이 아닌 구상(具象)의 영역에서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며, 이는 세계 미술사에서 드문 성과입니다.
다. 지역주의(Regionalism)의 승화와 보편성의 획득
변시지는 자신의 예술이 철저하게 제주의 '풍토(風土)'에 뿌리내려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보편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지역주의의 강력한 사례입니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듯이, 변시지는 제주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가장 지역적인 것(바람, 현무암, 조랑말)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간의 실존, 자연과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그의 '풍토 미학'은 지역성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비서구권 예술의 중요한 성취입니다.
3. 결론: 경계를 넘어선 독보적 거장
변시지는 일본 화단과 한국 화단, 서양화와 동양화,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경계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예술가입니다. 그는 주류 미술계의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실존적 고민과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의 풍토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그의 '제주화'는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과 극복, 동양 정신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복합적인 과제를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풀어낸 기념비적인 성과입니다. 황토빛과 검은 선으로 직조된 그의 폭풍의 풍경은 지역성을 넘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과 마주하게 하는 보편적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