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邊時志 – 시대의 경계에 선 이름⟫
풍토에서 발원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자기언어
서론: 'K'라는 글자 앞에서 선행 질문을 제출한다
K-모더니즘(K-Modernism)이라는 개념을 제출할 때, 우리는 하나의 선행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K'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K-팝에서 'K'는 한국에서 생산된 팝 음악이라는 지리적 기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K-모더니즘에서 'K'를 단순히 '한국에서 만들어진 모더니즘'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개념으로서 아무 변별력도 갖지 못한다. 일본에서 배운 서양화 기법을 서울 화실에서 구사한 것도, 뉴욕 추상표현주의를 서울에서 모방한 앵포르멜도 그 정의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것들이 K-모더니즘의 핵심이 될 수 있는가.
이 에세이는 K-모더니즘의 'K'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한국이라는 특수한 존재 조건 — 풍토, 장소, 역사적 상처, 문화적 기층 — 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미학. 이 정의에 따르면 K-모더니즘의 원류를 묻는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서구 모더니즘의 언어에 기대지 않고도 설 수 있는 한국 미술의 자기언어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변시지(邊時志, 1926~2013)를 K-모더니즘의 원류로 제출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재명명이 아니다. 이것은 기존 미술사가 전제해온 기준을 드러내고, 다른 기준으로 계보를 다시 쓰는 이론적 개입이다.
1. K-모더니즘의 'K'를 둘러싼 두 개의 기준
K-모더니즘의 기원을 논할 때 두 개의 기준이 경합한다.
기준 A는 서구 형식을 수용하되 한국적 맥락으로 재해석했는가를 묻는다. 이 기준에서 K-모더니즘의 주류는 단색화다. 박서보의 묘법, 윤형근의 번트 엄버와 울트라마린, 정상화의 박리-충전, 하종현의 배압법은 서구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의 형식적 어휘를 수용하면서 한국의 물성 감각, 수행적 반복, 불교적 비움으로 재구성한 미술이다. 단색화는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의 국제적 성공은 이 기준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2014~2016년 단색화 시장 붐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서구 컬렉터들이 그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추상의 동양적 변주"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언어로 번역될 때 비로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미술에, 'K'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것이 정당한가 — 이것이 기준 A가 직면하는 근본적 역설이다.
기준 B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외부 규범 없이도, 자신이 속한 풍토의 원리에서 미학이 발생했는가. 이 기준에서 단색화는 'K'이기 어렵다. 서구 추상 없이 단색화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면 변시지의 제주 시기 작업 — 황토색 바탕, 최소한의 흑선, 바람 속의 고독한 인물들 — 은 서구 추상의 언어로 번역되기를 거부한다. 이 미술은 제주의 빛과 바람과 현무암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풍토 자체가 미술의 존재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분법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유지하는 것은 현실의 복잡함을 단순화하는 위험을 안는다. 기준 A와 기준 B는 두 개의 분리된 칸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 축의 두 방향이다. 어떤 한국 현대미술도 20세기 서구와의 접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 점을 인정하되,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변시지는 그 축에서 기준 B를 향해 가장 멀리, 가장 일관되게 나아간 작가다. 그것이 그를 원류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원류는 절대적 순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 위치와 구조적 일관성의 문제다.
2. 연대기적 증거 — 변시지는 단색화 이전에 이미 다른 길 위에 있었다
원류라는 주장은 시간적 선행성과 구조적 순수성 두 차원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1931~1957년, 서구의 철저한 체화. 오사카에서 자란 변시지는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후기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수학했다. 1948년 광풍회전 최연소 최고상 수상, 니텐 입선 최초의 한국인. 이 이력은 이후 전환의 전제 조건으로서 결정적이다. 승화는 충분한 체화 없이 불가능하다.
1957~1975년, 비원 시대 — 결정적 분기점. 1957년 귀국 후 서울 미술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변시지 앞에는 주류 화단으로 진입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의 시대정신은 앵포르멜이었다. 유럽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열정적으로 수용하던 박서보를 필두로 한 세대가 국제적 동시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변시지는 이 흐름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자발적 거리두기"나 "의식적 저항"으로 읽는 것은 해석의 강도를 지나치게 높이는 것이다. 더 정확한 서술은 이렇다. 그는 자신의 감각이 향하는 곳으로 갔기 때문에 앵포르멜을 지나쳤다. 대립은 대립하는 것에 묶이지만, 집중은 묶이지 않는다. 비원(秘苑) — 창덕궁의 돌담, 연못, 고목, 처마선 — 을 선택한 것은 한국의 구체적 장소와 물질에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원 시기의 의미를 제주 시기의 서론으로만 읽는 것도 잘못이다. 비원 시기 작업은 그 자체로 완결된 미적 세계를 가졌다. 그것이 제주 시기와 연결되는 방식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감각 구조의 두 표현이다. 비원의 연못 물빛과 제주의 바람 — 이 두 요소는 다른 감각 기관을 통해 신체로 들어온다. 연못의 빛은 눈이 먼저 받아들이고, 바람은 피부와 무게중심이 먼저 받아들인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외부 세계가 신체를 통과하여 화면에 도달한다. 극사실주의에서 최소한의 선으로의 전환은 버림이 아니라 압축이다. 연못의 물빛을 그리기 위해 필요했던 수백 개의 붓질이 제주의 바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세 개의 선으로 압축된다. 같은 감각 원리가 더 순수한 형태를 찾아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분기가 일어난 시기다. 단색화 운동이 형성되던 바로 그 1960년대에, 변시지는 이미 서구 추상과 다른 방향을 실천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시간적 선행성은 이 비원 시대에 이미 성립한다.
1975~2013년, 제주 — 풍토 모더니즘의 완성. 44년 만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 변시지는 약 2년의 전환기를 거쳐 완성된 양식에 도달했다. 황토색 바탕, 최소한의 흑선, 바람 속의 인물, 조랑말, 까마귀, 해송. 변시지 자신의 증언이 이것을 명징하게 말한다. "제주공항에 내렸을 때,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모든 것이 누렇게 보였다. 제주를 한 색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누런색이다." 황토색 바탕은 미학적 결정이 아니라 감각적 필연이다. 그리고 이 귀환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출발점과 귀환점이 일치하는 그 구조 자체가 풍토적 귀속(belonging)의 완성이다.
3. 이론적 근거 —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과 비교 철학적 발견
변시지의 예술이 왜 K-모더니즘의 원류로 읽혀야 하는가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틀은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풍토론이다.
와쓰지는 1935년 『풍토: 인간학적 고찰』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전개했다.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를 시간성(Zeitlichkeit)으로 규정했다면, 와쓰지는 공간성, 즉 풍토적 조건이 시간성과 동등하게 인간 존재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와쓰지에게 풍토는 인간이 그 안에 있는 객관적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기후, 지형, 빛의 조건이 인간의 감각과 정서와 사유 방식을 형성한다.
변시지가 와쓰지를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연결은 이론가의 사후적 구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연결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이 더 중요한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와쓰지가 개념화한 것을 변시지가 독립적으로 실천했다면, 이것은 두 개의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동일한 구조의 사유가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향 관계의 주장이 아니라 비교 철학의 발견이다. "변시지가 와쓰지를 실천했다"가 아니라 "와쓰지의 풍토론과 변시지의 회화적 실천은 동아시아의 공통된 존재론적 감각을 각자의 방식으로 현현했다."
이 공명은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더 넓은 계보와 연결된다. 20세기 중국 화가 황빈홍은 전통 문인화의 묵법을 근대적 회화 감각으로 재구성하면서 특정 산천의 기후와 빛이 신체를 통과한 것이 그의 먹의 층위라고 말했다. 일본 모노하와 한국 단색화의 공명도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각각 독립적인 문화적 토대를 가진 채 서구 모더니즘의 물질과 행위 중심성에 대응하는 유사한 감각이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와쓰지가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 시간성을 공간성으로 보완했다는 것은, 서구 철학의 개념 틀 안에서 비서구적 감각이 서구 철학을 비판하는 자원이 된 사례다. 변시지의 작업은 이 철학적 비판을 이론 이전에, 이론 없이, 회화적 실천으로 수행한 것이다. 이론 이전의 신체적 실천이 철학적 명제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추상적 반박이 아니라 구체적 대안의 제시.
4. "소각"이 아니라 "승화" — 그러나 그 과정의 마찰을 함께 복원한다
변시지에 대한 기존 서술에서 종종 등장하는 "서구 기법을 버렸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황토색 바탕은 서양 유화 물감이고, 검은 선은 유화 매체 위에 놓인다. 기술적 기반은 끝까지 서양화다.
이 전환의 구조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개념은 승화(昇華, sublimation)다. 화학에서 승화는 고체가 액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기체가 되는 현상이다. 물질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을 조직하는 원리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변시지의 전환이 정확히 이 구조를 따른다. 서구 기법이라는 물질은 남아있되, 그것을 운용하는 존재 원리가 서구 표현의 논리에서 풍토 존재의 논리로 전환되었다. 유화 물감을 쓰면서도 문인화의 감필법으로 그린다는 것 —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구 기법을 충분히 체화한 뒤 그것의 원리 자체를 다른 원리로 교체해야 한다.
단색화와의 차이가 여기서 더 선명해진다. 단색화는 서구 추상의 그릇에 한국적 내용을 담았다. 형식은 서구, 내용은 한국의 정신적 원리. 변시지는 서구 기법의 물질을 보유하면서 그것을 운용하는 원리를 풍토에서 찾았다. 형식의 물질은 서구, 그것을 운용하는 문법은 풍토. 채움과 교체는 다르다.
그러나 승화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반드시 함께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 승화는 결과의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이지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다. 제주 초기 2~3년은 이 승화가 일어나는 지난한 마찰의 시간이었다. 황토색 바탕과 검은 선이 가진 팽팽한 긴장은, 서구와 동양 사이의 투쟁이 완전히 끝난 자리가 아니라 그 투쟁의 흔적이 생산적으로 지속되는 자리에서 온다.
바람 속 지팡이 인물을 보면 이 긴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황토색 바탕은 인물을 집어삼키지 않는다. 검은 선은 황토색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은 바람에 저항하는 것도 쓸려가는 것도 아니다. 기울어지면서 지팡이를 짚은 자세 — 바람의 힘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방향으로 서 있는 것. 완전히 저항하거나 완전히 굴복한 자세는 정적이다. 기울어지면서 서 있는 자세만이 진동한다. 이 진동이 그림의 에너지가 된다.
이 복원이 K-모더니즘 전체에 주는 통찰은 넓다. 단색화의 마찰을 복원한다는 것은 박서보가 묘법에 도달하기 전에 겪었던 표현 방식의 위기와 실험들을 담론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민중미술에서 오윤의 목판화가 가진 거칠고 직접적인 선은 정치적 현실과의 마찰에서 왔고, 그 마찰이 사라지면 목판화는 미술 운동의 기념물로만 남는다. K-모더니즘의 어떤 흐름도 고통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찰을 복원하는 것은 K-모더니즘을 완성된 양식들의 전시에서 살아있는 과정의 서술로 바꾸는 것이다.
5. 기준 B의 일반성 — 정선에서 변시지까지, 그리고 동시대 작가들
이 이론이 변시지를 위해서만 작동하는 순환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준 B가 다른 작가들에게 적용될 때 어떤 계보가 드러나는지를 살펴야 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기준 B의 가장 선명한 역사적 선례다. 18세기 조선 화단은 중국 남종화의 관념적 산수를 규범으로 삼았다. 정선이 금강산을 그렸을 때, 그것은 단순한 실경 묘사가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가상의 이상 풍토를 버리고, 조선의 화강암 지형과 빛을 미학 원리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기준 B를 적용하면 진경산수화는 "중국 남종화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한국 회화의 거의 유일한 전통이다. 이 계보에서 변시지는 20세기의 정선이다. 외부 규범(중국 이상 산수 / 서구 추상)을 충분히 통과한 뒤, 자신의 풍토로 귀환하여 그 풍토를 미학 원리로 전환한 것.
이중섭을 기준 B로 읽으면 흥미로운 역설이 드러난다. 제주 서귀포의 게와 아이들은 해양 생태와 빛 속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이미지다. 그러나 이중섭에게 제주는 귀속의 장소가 아니라 피난처였다. 그의 황소는 한반도라는 역사적 풍토 전체를 담지한다. 제주가 그에게 "잠깐의 해방감"으로 남는 이유는 그의 귀속이 제주라는 지형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역사적 상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지형적 풍토가 아니라 역사적 풍토에 귀속되었다. 기준 B의 두 가지 층위 — 지형적 귀속과 역사적 귀속 — 가 여기서 분리된다.
김환기는 귀속과 이탈이 동시에 작동하는 가장 복잡한 사례다. 서울-파리-뉴욕을 이동하면서 그는 한국의 구체적 이미지(항아리, 달, 학)를 점차 추상화했다. 뉴욕 말기 점화 시리즈는 이탈을 통해 귀속에 도달한 역설적 형태다. 그의 점들이 특정 풍토의 지형에서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귀향하고자 하는 기억의 풍토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기준 B의 변형된 형태를 충족한다. 기억의 귀속.
이응노는 신체적 귀속의 사례다. 프랑스에서 동양의 서예 원리로 앵포르멜을 전개한 그의 미학은 먹과 붓의 신체적 운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정 장소의 기후가 아니라 신체에 내면화된 문화적 기층이 그의 풍토다.
이 네 작가를 나란히 놓으면 기준 B는 단일한 기준이 아니라 스펙트럼임이 명확해진다. 지형적 귀속(변시지), 역사적 귀속(이중섭), 기억의 귀속(김환기), 신체적 귀속(이응노). 이 네 가지 귀속 양식이 한국 현대미술의 풍토적 자기언어 탐색의 네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이 스펙트럼 안에서 변시지가 기준 B의 가장 순수하고 일관된 형태를 구현했다는 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다른 세 작가의 귀속이 변형되거나 복합적인 형태를 취한다면, 변시지의 귀속은 지형과 기후가 그대로 미학 원리가 되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론이 기존 미술사의 "서구 수용 대 민족주의" 이분법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기존 대립은 미술을 외부와의 관계로만 정의한다. 그러나 귀속/이탈의 축은 외부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풍토와의 관계를 묻는다. 서구를 완전히 받아들인 작가도 기준 B를 충족할 수 있고, 민족주의를 표방한 작가도 기준 B와 무관할 수 있다. 이 방법론은 수용/거부의 축을 귀속/이탈의 축으로 교체함으로써, 제3의 계보 서술 원리를 제안한다.
6. 글로컬리즘의 시대와 원류 서사의 현재적 긴급성
롤랜드 로버트슨이 정식화한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개념의 핵심은 "지역이 세계화에 저항한다"는 방어적 논리가 아니라 "지역적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의 생산 조건이 된다"는 능동적 논리다. 동화적 번역과 확장적 번역의 차이가 이 논리와 정확하게 대응한다.
단색화의 국제적 성공은 동화적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서구 추상과 같은 종류의 미술이다"라는 방식. 이것은 기존 지도 위에서 한국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변시지가 지향하는 방향은 확장적 번역이다. "이것은 당신이 아직 갖지 않은 경험의 언어다"라는 방식. 이것은 지도 자체를 새로 그리는 것이다. 로버트슨이 말한 "지역이 세계를 생산한다"는 것은 정확히 이 확장적 번역의 구조다.
타이밍의 문제도 중요하다. 이 이론이 1980년대에 제출되었다면, 단색화가 한국 미술의 유일한 국제적 출구이던 그 시기에 "단색화는 기준 B의 K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한국 미술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단색화의 국제적 위치가 확립되고, 동시에 서구 중심 모더니즘 서사 자체가 글로벌 담론에서 근본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한 지금, 이 이론은 단색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K-모더니즘의 스펙트럼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타이밍은 이 이론의 조건이지 근거가 아니다. 기준 B는 글로컬리즘 담론이 쇠퇴하더라도 유효하다. 이론의 뼈대가 담론보다 단단할 때, 이론은 담론의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결론: 원류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순수성의 문제다
변시지를 K-모더니즘의 원류로 부르는 것에 대한 반론은 두 방향에서 온다. 단색화가 더 넓은 국제적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미술사 교과서가 아직 변시지를 그 자리에 놓지 않는다는 것.
첫 번째 반론에 대해. 영향력은 원류의 기준이 아니다. 더 널리 읽힌 번역본이 원전을 대체할 수 없듯, 더 넓은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단색화가 풍토 모더니즘의 원형을 대체하지 않는다. 원류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순수성의 문제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 미술사 교과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이론은 앞으로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오쿠이 엔위저가 도쿠멘타 11을 통해 비서구 미술을 동시대성의 언어로 재프레이밍했을 때, 그것은 미술사 서술이 아니라 큐레이토리얼 이론의 구성이었다. 미술사가 이론을 따라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이 에세이도 같은 방향에서 읽혀야 한다.
이 이론이 K-모더니즘을 읽는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을 때, 그것은 변시지라는 한 작가의 재조명을 넘어선다. 세계 미술이 장소와 풍토와 신체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 — 그것이 이 이론이 세계 미술사에 제출하는 'K'다. 서구 모더니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K도, 동아시아 전통의 계승으로 정의되는 K도 아닌, 특정한 기후와 지형과 빛이 인간의 신체를 통과하여 회화의 원리가 되는 과정 — 그 과정이 어느 풍토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보편성을 가지면서, 변시지의 제주에서 가장 순수하게 구현되었다는 특수성을 갖는 그 'K'.
풍토가 존재 원리가 된다는 것. 그것을 회화적 언어로 증명한 작가가 있다는 것. 그 증명이 철학보다 먼저, 이론보다 먼저, 캔버스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이것이 변시지가 세계 미술사에 제출하는 주장이다.
이 에세이는 완성된 미술사 서술이 아니라 이론적 제안이다. K-모더니즘의 'K'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선행 질문을 담론 안에 제출하고, 그 정의에 따라 변시지가 어떤 자리에 서는지를 논증한다. 이 제안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작품 연구, 비교 분석, 그리고 국제 큐레이터 및 연구자들과의 대화를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 변시지 미학의 존재론
1. 자화상의 오래된 질문
자화상은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다.
화가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얼굴 속에서 한 인간의 시간과 감정을 기록한다. 네덜란드 화가 Rembrandt van Rijn은 자신의 얼굴을 통해 인간의 생애를 기록했다. 청년기의 자신감에서 노년의 피로까지, 그의 자화상은 한 인간의 시간의 연대기가 된다. Vincent van Gogh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정신을 응시했다. 그의 자화상은 격렬한 색과 선으로 흔들리는 내면을 드러낸다. Frida Kahlo는 자신의 몸을 통해 고통과 정체성을 기록했다.
이 전통에서 자화상은 한 가지 방식으로 정의된다.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을 통해 자아를 탐구하는 회화다.
그러나 이 정의는 모든 자화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2. 자화상의 두 가지 길
미술사에서 자화상은 사실 두 가지 길로 나뉜다.
첫 번째 길은 거울 앞의 자화상이다.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고 그 모습을 기록한다. 이 경우 자화상은 일인칭 시점을 갖는다. 화가는 ‘나’를 바라본다.
두 번째 길은 풍경 속의 자화상이다.
화가는 자신의 얼굴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그린다. 풍경은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화가의 내면 상태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은 실제 풍경이면서 동시에 그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그의 내면의 격동이며, 사이프러스 나무의 불꽃 같은 형상은 그의 열정을 상징한다.
이때 자화상은 더 이상 얼굴의 초상이 아니라 세계의 초상이 된다.
3. 삼인칭 자화상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삼인칭 자화상이다.
삼인칭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풍경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화가는 자신을 직접 응시하지 않는다. 그는 풍경 속의 ‘그’를 바라본다.
이때 자화상은 거울 속의 얼굴이 아니라 세계 속에 놓인 인간의 모습이 된다.
4. 풍토라는 조건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토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일본 철학자 Watsuji Tetsuro는 인간을 단독의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항상 풍토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했다. 인간은 기후, 지형, 역사,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자연 속에 놓여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얼굴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을 보아야 한다.
5. 변시지와 풍토적 자화상
이 철학적 관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변시지의 회화다.
변시지는 몇 점의 얼굴 자화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른 인물이다. 구부정한 등을 하고 지팡이를 짚은 채 바람 속에 서 있는 사내다.
이 인물은 이름이 없고 얼굴도 없다. 그러나 그는 수천 점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이 사내는 특정한 개인의 초상이 아니다. 동시에 화가의 분신이다. 그의 굽은 등은 인간이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몸의 형상이며, 지팡이는 인간의 불완전한 육체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의 작은 몸은 거대한 풍경 속에서 항상 바람을 맞고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풍토 속에 놓인 인간의 존재 조건을 보여준다.
6. 마른 풀잎색의 세계
변시지의 화면은 하나의 색으로 기억된다. 흔히 그것을 황토색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색은 단순한 황토색이 아니다.
그 색은 제주의 햇볕과 바람이 만들어 낸 마른 풀잎색이다.
강한 햇빛과 소금기 어린 공기 속에서 풀잎은 점점 색을 잃는다. 그 결과 남는 색이 바로 이 색이다. 그것은 생명의 색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남긴 흔적이다.
따라서 이 색은 단순한 자연의 색이 아니라 시간의 색이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내 역시 그 시간의 일부가 된다.
7. 거주하는 인간
독일 철학자 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거주하는 존재다.
거주한다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발을 딛고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다.
변시지의 사내는 풍경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다. 그는 바람을 맞으며 그 풍경 속에 서 있다.
그는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8. 풍토적 3인칭 자화상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풍토적 3인칭 자화상이다.
풍토적 3인칭 자화상은 화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형성된 풍토 전체를 통해 자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화가는 자신의 얼굴 대신 바람과 대지, 하늘과 수평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작은 인간을 놓는다.
그 인간이 바로 화가다.
9. 열린 자화상
변시지의 사내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래서 그 얼굴은 비어 있다.
그 빈 자리에는 관람자의 얼굴이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그 사내에게서 자신의 고독을 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다림을 본다.
그래서 변시지의 자화상은 완성된 초상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마다 새롭게 완성되는 열린 자화상이다.
결론
서양 미술에서 자화상은 얼굴을 통해 자아를 탐구하는 장르였다.
그러나 변시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그렸다.
바람이 불고
마른 풀잎색 대지가 펼쳐지고
수평선이 멀리 이어지는 풍경 속에
한 인간이 서 있다.
그 인간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그것이 바로 풍토적 3인칭 자화상이다.
— 열 개의 시선으로 그리는 하나의 풍경
서(序) — 지도 밖의 화가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 지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1950년대 앵포르멜의 충격에서 1970년대 단색화의 성취까지, 그 계보는 서울에서 전개되었고, 서울의 화단이 평가했으며, 서울의 미술관이 기록했다. 이 지도에 변시지는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스스로 그 지도에서 걸어나왔다. 서울 화단에서 일정한 위치를 가졌던 비원 시절을 버리고 1975년 제주로 내려간 순간, 그는 공식 서사에서 사라졌다. 서귀포의 아틀리에에서 혼자 황토빛 캔버스를 마주한 40년—그 시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에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지도가 그리지 못한 영토가 있다면, 잘못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지도다. 이 글은 그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한 시도다. 변시지라는 한 화가를 통해, 서울 중심의 한국 모더니즘 서사가 놓친 것을 복원하려는 시도. 그를 위해 열 개의 시선이 필요했다. 식민지 교육의 역설, 귀향의 윤리, 침묵의 증언, 풍경의 정치성, 그리고 고갱·키퍼·카푸어·골즈워디와의 국제적 대화—이 시선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하나의 풍경이 떠오른다. 풍토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의 풍경.
* * *
1 — 적의 문법으로 쓴 시
"나는 적의 문법으로 시를 썼다. 그 문법이 나를 배반하기 전에, 나는 그것을 배반했다."
— 에메 세제르
1931년, 여섯 살의 변시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사카로 건너갔다. 선택하는 나이가 아니라 따라가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 따라감이 이후 예술 전체를 결정했다. 그는 일본어로 그림을 배웠다. 일본의 눈으로 서양화를 보았고, 일본의 손으로 유화를 익혔으며, 일본의 미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받았다. 1945년 해방의 해에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했을 때, 해방은 왔지만 그가 그림을 배운 언어는 바뀌지 않았다.
도쿄에서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에 든 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었다. 데라우치는 일본 서양화의 거장 구로다 세이키의 제자였고, 구로다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일본에 이식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조선인 청년에게로 이어지는 계보의 가장 외곽에 변시지가 서게 된다. 그리고 1948년, 광풍회전 최고상. 100여 년 역사상 최연소, 조선인 최초. 한쪽에서 보면 이것은 동화의 성공이다. 식민지 출신의 청년이 제국의 기준으로 최고를 인정받은 것. 그러나 다른 쪽에서 보면 이것은 잠입이다. 제국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제국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 그 내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지 않은 것.
식민지 예술교육의 진정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억압자의 언어가 그 억압을 해체하는 도구로 전용되는 구조. 변시지는 유화라는 서양 매체를 익혔지만, 그 매체의 가장 서양적인 특성—기름기 있는 광택, 두터운 마티에르—을 제거했다. 유화 물감에서 기름기를 뺀다는 것은 서양화에서 서양을 빼는 것이다. 남은 것은 장판지의 질감, 황토의 따뜻함, 갈필이 만드는 동양 서예의 호흡이었다. 그는 서양의 매체를 가져다가 그 안에 한국의 살갗을 입혔다.
* * *
2 — 떠남과 돌아옴
"나는 유럽의 문명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야생의 것만을 그리고 싶었다."
— 폴 고갱, 타히티에서 보낸 편지
1891년 고갱은 파리를 떠나 타히티로 갔다. 1975년 변시지는 서울을 떠나 제주로 돌아왔다. 표면적으로 닮아 있다. 문명의 중심을 버리고 주변부의 자연으로 들어간 것. 그러나 이 두 이동의 방향은 존재론적으로 정반대다. 고갱은 떠났다. 변시지는 돌아왔다.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다. 돌아오는 자는 익숙한 곳에서 자신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것은 타히티가 아니었다. 유럽 문명에 지친 한 프랑스 화가가 상상한 '원시'였다. 타히티 여성들의 풍만한 몸, 이국적 색채, 문명 이전의 순수함—이 모든 것은 고갱의 눈을 통해 재구성된 환상이었다. 실제 타히티인들의 삶, 이미 겪고 있던 식민지배의 현실은 고갱의 캔버스에서 지워졌다. 고갱에게 타히티인들은 주체가 아니라 소재였다. 미적 착취.
변시지는 제주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다. 그는 제주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제주 속에서 자신을 그렸다. 풍경과 화가가 분리되지 않는다. 고갱의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했다면, 변시지의 시선은 내부에서 더 깊은 내부로 향했다. 타자의 땅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그 땅이 자신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고갱이 찾은 것은 원시(原始)—역사 밖의 순수한 야생이었다. 변시지가 찾은 것은 근원(根源)—자신을 만든 세계의 가장 깊은 층위, 4·3의 상처를 기억하고 바람과 가난의 역사를 통과해온 구체적인 땅이었다.
고갱의 이동은 도피였다. 변시지의 이동은 책임의 수락이었다. 서울에서의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낯설어진 고향의 가난 속으로 돌아온 것. 귀향의 윤리. 떠나지 않는 용기. 이 차이가 두 화가의 예술적 성격 전체를 갈라놓는다.
* * *
3 — 부재의 증언
"섬은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 섬은 그저 거기에 있다."
— 모리스 블랑쇼
1948년 봄, 변시지는 도쿄에 있었다. 광풍회전 출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봄, 그의 고향 제주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4월 3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학살은 6년간 이어지며 섬 인구의 10분의 1을 지웠다. 변시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여섯 살에 떠났으니, 제주는 그에게 몸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부재의 장소였다. 일본 화단의 최연소 스타가 된 바로 그 봄, 고향은 불타고 있었다. 이것을 비난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재는, 이후 삶 전체를 통해 하나의 무게로 변환된다.
1975년 귀향 이후, 변시지는 4·3을 소재로 한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피를 그리지 않았고, 시신을 그리지 않았으며, 학살을 고발하는 도상을 만들지 않았다. 이 침묵은 복합적이다. 첫째, 독재 하에서 4·3을 그린다는 것은 위험했다. 둘째, 변시지 자신의 말처럼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속 저항'이었다. 4·3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그 총량의 고통을 폭풍의 형식 속에 압축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읽기가 있다. 그는 경험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없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린다는 것은 증언이 아니라 오염일 수 있다. 부재했던 자의 윤리는 때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지 않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웅크린 사내는 왜 웅크리고 있는가. 검은 까마귀떼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폭풍 속에 혼자 서 있는 사내의 등은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4·3을 아는 눈으로 그의 그림을 보면, 화면들이 전혀 다르게 읽힌다. 4·3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로, 4·3 이후의 세계를—살아남은 자들의 몸과 풍경을—계속 그렸다는 것. 부재의 증언.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 * *
4 — 검열이 닿지 못하는 언어
"억압받는 자들은 두 가지 언어를 가진다.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때로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한다."
— 자크 랑시에르
풍경화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장르처럼 보인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돌담은 이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음'이 이미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1975년 유신 체제 하에서 제주의 바람을 그린다는 것—폭풍을 그리고, 웅크린 사내를 그리고, 황토빛 하늘 아래 구부러진 소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검열이 도달할 수 없는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었다.
검열은 명시적인 것을 겨냥한다. 이름이 있는 것, 주장이 있는 것, 고발이 있는 것을 찾아내어 제거한다. 그러나 황토빛 하늘 아래 구부러진 소나무를 금지할 근거는 없다. 변시지의 풍경은 검열의 구조적 맹점을 통과한다. 그의 폭풍은 실재하는 자연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억압의 형상화다. 두 층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 있다. 웅크린 사내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많은 섬에서 평생을 산 몸이 자연스럽게 익히는 자세이면서, 동시에 4·3을 살아남은 자의 자세다. 자연적인 자세와 역사적인 자세가 같은 몸 안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풍경화의 역설적 힘이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금지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주장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말해진다.
* * *
5 — 상처 입은 땅을 그리는 세 가지 방식
"독일의 역사는 재가 되었다. 나는 그 재 위에 선다."
— 안셀름 키퍼
안셀름 키퍼의 재료는 납이다. 무겁고, 독성이 있으며, 빛을 흡수한다. 죽음의 재료이자 봉인의 재료. 불탄 밀밭, 납으로 만든 날개, 재가 된 책들—키퍼의 캔버스는 독일 역사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때로는 잔혹하리만큼 명시적으로 담는다. 변시지의 재료는 황토다. 씨앗을 키우는 흙이고, 집을 짓는 재료이며,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는 땅. 키퍼가 역사의 무게를 직접 들어올린다면, 변시지는 역사의 무게를 땅속에 스며들게 한다. 키퍼는 상처를 드러내고, 변시지는 상처를 품는다. 납과 황토—이 두 재료의 차이가 두 화가의 역사 인식을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두 방식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 상처 입은 땅을 버리지 않는 것. 키퍼는 독일을 떠나지 않았고, 변시지는 제주를 다시 선택했다. 상처 입은 땅을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땅 자체가 되는 것. 상처 입은 땅은 말할 수 있다. 말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아니시 카푸어는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서양 현대미술의 언어—설치, 개념, 추상—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힌두교적 공(空)의 개념을 그 안에 녹여넣었다. 비서구의 근원을 서양의 형식으로 번역하여 세계 미술의 중심에 선 것이다. 변시지는 반대로 움직였다. 서양 유화의 언어를 익혔지만, 그것을 세계의 중심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그 언어를 들고 주변부로 돌아갔다. 카푸어가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향했다면, 변시지는 중심에서 근원으로 향했다. 카푸어의 공이 비움을 통해 무한을 지향한다면, 변시지의 황토는 채움을 통해 근원을 지향한다. 비서구 모더니즘은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이 두 방향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지도가 그려진다.
앤디 골즈워디와의 비교는 장소에 대한 관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골즈워디는 전 세계의 장소에서 작업한다. 그 장소의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사진으로 기록한 뒤 떠난다. 낙엽 구조물, 얼음 탑, 돌 아치—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작품의 소멸 자체가 작품의 일부다. 변시지는 한 장소에서만 작업했다. 같은 바다, 같은 바람, 같은 돌담을 40년간 반복해서 그렸다. 골즈워디의 '장소 특정 예술(site-specific art)'이 장소와의 일시적 대화라면, 변시지의 제주화는 장소와의 전생애적 귀속이다. 골즈워디는 장소 속에 있다. 변시지는 장소가 된다.
* * *
6 — 에콜 드 서귀포
"파리는 중심이 아니었다. 파리는 주변부들이 모여 중심을 만든 곳이었다."
— 게르트루드 스타인
20세기 초 파리에는 세계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샤갈은 러시아에서,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수틴은 리투아니아에서,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몽파르나스의 싸구려 아틀리에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 이 사람들을 묶는 이름이 에콜 드 파리였다. 역설적이게도, 세계 미술의 중심이라 불린 파리는 사실 주변부 출신들이 만든 것이었다.
서귀포는 파리의 반대편이다. 화랑도 비평가도 컬렉터도 없는 소도시. 에콜 드 파리가 집단이었다면, 에콜 드 서귀포는 독방이었다. 한 화가, 한 아틀리에, 한 장소.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와 까마귀 소리 속에서 혼자 캔버스를 마주하는 시간. 변시지의 대화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었고, 파도였으며, 돌담이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풍토의 언어와 40년간 대화했다. 이 고독이 그의 예술의 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세계가 서귀포를 향해 왔다. 2007년, 스미소니언이 변시지의 작품을 10년 상설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의 중심으로 가지 않았지만, 세계의 중심이 찾아왔다.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그 주변부가 결국 중심이 되었다.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 되는 역설—서귀포라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가 인류 보편의 감정에 닿은 것이다.
* * *
7 — 이름을 붙이는 자
"나는 제주화를 그린다."
— 변시지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장르 이름을 붙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비평가가 조롱으로 붙인 것이 굳어진 것이고, 단색화라는 이름도 비평적 언어가 사후에 붙인 것이다. 변시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제주화(濟州畵)'라 불렀다. 비평가의 명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주화라는 이름은 소재의 이름이 아니다. 형식의 선언이다. 제주의 풍토가 자신의 예술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 자체를 결정한다는 것. 황토색, 검은 선, 갈필, 단순화된 형태—이 모든 형식적 선택이 제주라는 장소에서 나왔다는 선언. 동시에 자율성의 선언이기도 하다. 한국화도 아니고 서양화도 아니며 일본화도 아닌, 제주라는 특수한 풍토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고유한 형식.
이름이 붙기 이전과 이후, 그림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이 무엇인지가 달라졌다. 이름 이전의 그림들은 제주를 소재로 한 유화였고, 이름 이후의 그림들은 제주화였다. 소재를 담은 그릇에서 장르 자체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시지 이후에 제주를 그리는 화가는 선택해야 한다. 제주화를 계승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변형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제주화라는 이름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하나의 이름이 만드는 예술사적 힘이다.
* * *
결(結) — 풍토 모더니즘이라는 원류
이제 다시 처음의 지도로 돌아간다.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 지도에서 변시지가 빠져 있었다면, 그것은 변시지의 부재가 아니라 지도의 결핍이다. 이 글이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결핍된 좌표다.
서양 모더니즘에도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도시의 모더니즘—파리, 뉴욕, 베를린의 속도와 파편화. 장소의 모더니즘—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한 장소를 반복해서 파고들며 그 장소에서 모더니즘의 언어를 발견한 것. 한국 모더니즘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모더니즘이 있었고, 변시지의 제주화가 보여주는 장소의 모더니즘이 있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개념이 필요하다. 풍토 모더니즘(風土 Modernism). 서양 모더니즘의 형식적 언어—추상, 단순화, 본질의 추구—를 수용하되, 그 언어를 특정 풍토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경로. 변시지의 제주화가 이 개념의 가장 선명한 실례다. 그는 서양 유화의 언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언어를 제주의 풍토 속에서 변형시켰다. 황토색은 서양 인상주의의 색채가 제주의 태양 아래서 변형된 것이고, 갈필의 선은 서양 데생의 문법이 동양 서예의 필법과 제주의 바람 앞에서 변형된 것이다.
단색화와 제주화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전개되었지만, 방향이 달랐다. 단색화가 물질과 행위의 순수성을 추구했다면, 제주화는 풍토와 장소의 구체성을 추구했다. 단색화는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모더니즘의 전부는 아니다. 두 방향이 함께 있을 때 한국 모더니즘은 더 온전해진다.
변시지의 탄생 100주년인 2026년, 이 재조명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한 화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모더니즘의 공식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 서울 중심의 서사에 제주의 풍토를 더하는 것. K-모더니즘의 계보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었던 원류를 복원하는 것.
근대는 서울에서만 오지 않았다. 제주의 황토빛 풍토에서도, 바람과 돌담과 까마귀 속에서도, 40년간 같은 장소를 파고든 한 화가의 캔버스 위에서도 왔다. 그 캔버스 앞에서 그는 혼자였지만, 그의 그림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풍토가 함께 그렸다. 바람이 함께 그렸다. 제주라는 이름의 세계 전체가, 그의 붓끝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 열 개의 시선으로 그리는 하나의 풍경
서(序) — 지도 밖의 화가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 지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1950년대 앵포르멜의 충격에서 1970년대 단색화의 성취까지, 그 계보는 서울에서 전개되었고, 서울의 화단이 평가했으며, 서울의 미술관이 기록했다. 이 지도에 변시지는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스스로 그 지도에서 걸어나왔다. 서울 화단에서 일정한 위치를 가졌던 비원 시절을 버리고 1975년 제주로 내려간 순간, 그는 공식 서사에서 사라졌다. 서귀포의 아틀리에에서 혼자 황토빛 캔버스를 마주한 40년—그 시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에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지도가 그리지 못한 영토가 있다면, 잘못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지도다. 이 글은 그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한 시도다. 변시지라는 한 화가를 통해, 서울 중심의 한국 모더니즘 서사가 놓친 것을 복원하려는 시도. 그를 위해 열 개의 시선이 필요했다. 식민지 교육의 역설, 귀향의 윤리, 침묵의 증언, 풍경의 정치성, 그리고 고갱·키퍼·카푸어·골즈워디와의 국제적 대화—이 시선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하나의 풍경이 떠오른다. 풍토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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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적의 문법으로 쓴 시
"나는 적의 문법으로 시를 썼다. 그 문법이 나를 배반하기 전에, 나는 그것을 배반했다."
— 에메 세제르
1931년, 여섯 살의 변시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사카로 건너갔다. 선택하는 나이가 아니라 따라가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 따라감이 이후 예술 전체를 결정했다. 그는 일본어로 그림을 배웠다. 일본의 눈으로 서양화를 보았고, 일본의 손으로 유화를 익혔으며, 일본의 미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받았다. 1945년 해방의 해에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했을 때, 해방은 왔지만 그가 그림을 배운 언어는 바뀌지 않았다.
도쿄에서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에 든 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었다. 데라우치는 일본 서양화의 거장 구로다 세이키의 제자였고, 구로다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일본에 이식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조선인 청년에게로 이어지는 계보의 가장 외곽에 변시지가 서게 된다. 그리고 1948년, 광풍회전 최고상. 100여 년 역사상 최연소, 조선인 최초. 한쪽에서 보면 이것은 동화의 성공이다. 식민지 출신의 청년이 제국의 기준으로 최고를 인정받은 것. 그러나 다른 쪽에서 보면 이것은 잠입이다. 제국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제국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 그 내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지 않은 것.
식민지 예술교육의 진정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억압자의 언어가 그 억압을 해체하는 도구로 전용되는 구조. 변시지는 유화라는 서양 매체를 익혔지만, 그 매체의 가장 서양적인 특성—기름기 있는 광택, 두터운 마티에르—을 제거했다. 유화 물감에서 기름기를 뺀다는 것은 서양화에서 서양을 빼는 것이다. 남은 것은 장판지의 질감, 황토의 따뜻함, 갈필이 만드는 동양 서예의 호흡이었다. 그는 서양의 매체를 가져다가 그 안에 한국의 살갗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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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떠남과 돌아옴
"나는 유럽의 문명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야생의 것만을 그리고 싶었다."
— 폴 고갱, 타히티에서 보낸 편지
1891년 고갱은 파리를 떠나 타히티로 갔다. 1975년 변시지는 서울을 떠나 제주로 돌아왔다. 표면적으로 닮아 있다. 문명의 중심을 버리고 주변부의 자연으로 들어간 것. 그러나 이 두 이동의 방향은 존재론적으로 정반대다. 고갱은 떠났다. 변시지는 돌아왔다.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다. 돌아오는 자는 익숙한 곳에서 자신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것은 타히티가 아니었다. 유럽 문명에 지친 한 프랑스 화가가 상상한 '원시'였다. 타히티 여성들의 풍만한 몸, 이국적 색채, 문명 이전의 순수함—이 모든 것은 고갱의 눈을 통해 재구성된 환상이었다. 실제 타히티인들의 삶, 이미 겪고 있던 식민지배의 현실은 고갱의 캔버스에서 지워졌다. 고갱에게 타히티인들은 주체가 아니라 소재였다. 미적 착취.
변시지는 제주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다. 그는 제주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제주 속에서 자신을 그렸다. 풍경과 화가가 분리되지 않는다. 고갱의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했다면, 변시지의 시선은 내부에서 더 깊은 내부로 향했다. 타자의 땅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그 땅이 자신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고갱이 찾은 것은 원시(原始)—역사 밖의 순수한 야생이었다. 변시지가 찾은 것은 근원(根源)—자신을 만든 세계의 가장 깊은 층위, 4·3의 상처를 기억하고 바람과 가난의 역사를 통과해온 구체적인 땅이었다.
고갱의 이동은 도피였다. 변시지의 이동은 책임의 수락이었다. 서울에서의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낯설어진 고향의 가난 속으로 돌아온 것. 귀향의 윤리. 떠나지 않는 용기. 이 차이가 두 화가의 예술적 성격 전체를 갈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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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부재의 증언
"섬은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 섬은 그저 거기에 있다."
— 모리스 블랑쇼
1948년 봄, 변시지는 도쿄에 있었다. 광풍회전 출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봄, 그의 고향 제주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4월 3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학살은 6년간 이어지며 섬 인구의 10분의 1을 지웠다. 변시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여섯 살에 떠났으니, 제주는 그에게 몸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부재의 장소였다. 일본 화단의 최연소 스타가 된 바로 그 봄, 고향은 불타고 있었다. 이것을 비난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재는, 이후 삶 전체를 통해 하나의 무게로 변환된다.
1975년 귀향 이후, 변시지는 4·3을 소재로 한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피를 그리지 않았고, 시신을 그리지 않았으며, 학살을 고발하는 도상을 만들지 않았다. 이 침묵은 복합적이다. 첫째, 독재 하에서 4·3을 그린다는 것은 위험했다. 둘째, 변시지 자신의 말처럼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속 저항'이었다. 4·3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그 총량의 고통을 폭풍의 형식 속에 압축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읽기가 있다. 그는 경험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없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린다는 것은 증언이 아니라 오염일 수 있다. 부재했던 자의 윤리는 때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지 않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웅크린 사내는 왜 웅크리고 있는가. 검은 까마귀떼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폭풍 속에 혼자 서 있는 사내의 등은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4·3을 아는 눈으로 그의 그림을 보면, 화면들이 전혀 다르게 읽힌다. 4·3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로, 4·3 이후의 세계를—살아남은 자들의 몸과 풍경을—계속 그렸다는 것. 부재의 증언.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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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검열이 닿지 못하는 언어
"억압받는 자들은 두 가지 언어를 가진다.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때로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한다."
— 자크 랑시에르
풍경화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장르처럼 보인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돌담은 이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음'이 이미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1975년 유신 체제 하에서 제주의 바람을 그린다는 것—폭풍을 그리고, 웅크린 사내를 그리고, 황토빛 하늘 아래 구부러진 소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검열이 도달할 수 없는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었다.
검열은 명시적인 것을 겨냥한다. 이름이 있는 것, 주장이 있는 것, 고발이 있는 것을 찾아내어 제거한다. 그러나 황토빛 하늘 아래 구부러진 소나무를 금지할 근거는 없다. 변시지의 풍경은 검열의 구조적 맹점을 통과한다. 그의 폭풍은 실재하는 자연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억압의 형상화다. 두 층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 있다. 웅크린 사내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많은 섬에서 평생을 산 몸이 자연스럽게 익히는 자세이면서, 동시에 4·3을 살아남은 자의 자세다. 자연적인 자세와 역사적인 자세가 같은 몸 안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풍경화의 역설적 힘이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금지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주장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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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상처 입은 땅을 그리는 세 가지 방식
"독일의 역사는 재가 되었다. 나는 그 재 위에 선다."
— 안셀름 키퍼
안셀름 키퍼의 재료는 납이다. 무겁고, 독성이 있으며, 빛을 흡수한다. 죽음의 재료이자 봉인의 재료. 불탄 밀밭, 납으로 만든 날개, 재가 된 책들—키퍼의 캔버스는 독일 역사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때로는 잔혹하리만큼 명시적으로 담는다. 변시지의 재료는 황토다. 씨앗을 키우는 흙이고, 집을 짓는 재료이며,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는 땅. 키퍼가 역사의 무게를 직접 들어올린다면, 변시지는 역사의 무게를 땅속에 스며들게 한다. 키퍼는 상처를 드러내고, 변시지는 상처를 품는다. 납과 황토—이 두 재료의 차이가 두 화가의 역사 인식을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두 방식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 상처 입은 땅을 버리지 않는 것. 키퍼는 독일을 떠나지 않았고, 변시지는 제주를 다시 선택했다. 상처 입은 땅을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땅 자체가 되는 것. 상처 입은 땅은 말할 수 있다. 말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아니시 카푸어는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서양 현대미술의 언어—설치, 개념, 추상—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힌두교적 공(空)의 개념을 그 안에 녹여넣었다. 비서구의 근원을 서양의 형식으로 번역하여 세계 미술의 중심에 선 것이다. 변시지는 반대로 움직였다. 서양 유화의 언어를 익혔지만, 그것을 세계의 중심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그 언어를 들고 주변부로 돌아갔다. 카푸어가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향했다면, 변시지는 중심에서 근원으로 향했다. 카푸어의 공이 비움을 통해 무한을 지향한다면, 변시지의 황토는 채움을 통해 근원을 지향한다. 비서구 모더니즘은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이 두 방향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지도가 그려진다.
앤디 골즈워디와의 비교는 장소에 대한 관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골즈워디는 전 세계의 장소에서 작업한다. 그 장소의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사진으로 기록한 뒤 떠난다. 낙엽 구조물, 얼음 탑, 돌 아치—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작품의 소멸 자체가 작품의 일부다. 변시지는 한 장소에서만 작업했다. 같은 바다, 같은 바람, 같은 돌담을 40년간 반복해서 그렸다. 골즈워디의 '장소 특정 예술(site-specific art)'이 장소와의 일시적 대화라면, 변시지의 제주화는 장소와의 전생애적 귀속이다. 골즈워디는 장소 속에 있다. 변시지는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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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에콜 드 서귀포
"파리는 중심이 아니었다. 파리는 주변부들이 모여 중심을 만든 곳이었다."
— 게르트루드 스타인
20세기 초 파리에는 세계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샤갈은 러시아에서,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수틴은 리투아니아에서,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몽파르나스의 싸구려 아틀리에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 이 사람들을 묶는 이름이 에콜 드 파리였다. 역설적이게도, 세계 미술의 중심이라 불린 파리는 사실 주변부 출신들이 만든 것이었다.
서귀포는 파리의 반대편이다. 화랑도 비평가도 컬렉터도 없는 소도시. 에콜 드 파리가 집단이었다면, 에콜 드 서귀포는 독방이었다. 한 화가, 한 아틀리에, 한 장소.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와 까마귀 소리 속에서 혼자 캔버스를 마주하는 시간. 변시지의 대화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었고, 파도였으며, 돌담이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풍토의 언어와 40년간 대화했다. 이 고독이 그의 예술의 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세계가 서귀포를 향해 왔다. 2007년, 스미소니언이 변시지의 작품을 10년 상설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의 중심으로 가지 않았지만, 세계의 중심이 찾아왔다.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그 주변부가 결국 중심이 되었다.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 되는 역설—서귀포라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가 인류 보편의 감정에 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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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이름을 붙이는 자
"나는 제주화를 그린다."
— 변시지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장르 이름을 붙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비평가가 조롱으로 붙인 것이 굳어진 것이고, 단색화라는 이름도 비평적 언어가 사후에 붙인 것이다. 변시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제주화(濟州畵)'라 불렀다. 비평가의 명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주화라는 이름은 소재의 이름이 아니다. 형식의 선언이다. 제주의 풍토가 자신의 예술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 자체를 결정한다는 것. 황토색, 검은 선, 갈필, 단순화된 형태—이 모든 형식적 선택이 제주라는 장소에서 나왔다는 선언. 동시에 자율성의 선언이기도 하다. 한국화도 아니고 서양화도 아니며 일본화도 아닌, 제주라는 특수한 풍토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고유한 형식.
이름이 붙기 이전과 이후, 그림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이 무엇인지가 달라졌다. 이름 이전의 그림들은 제주를 소재로 한 유화였고, 이름 이후의 그림들은 제주화였다. 소재를 담은 그릇에서 장르 자체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시지 이후에 제주를 그리는 화가는 선택해야 한다. 제주화를 계승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변형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제주화라는 이름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하나의 이름이 만드는 예술사적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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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結) — 풍토 모더니즘이라는 원류
이제 다시 처음의 지도로 돌아간다.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 지도에서 변시지가 빠져 있었다면, 그것은 변시지의 부재가 아니라 지도의 결핍이다. 이 글이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결핍된 좌표다.
서양 모더니즘에도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도시의 모더니즘—파리, 뉴욕, 베를린의 속도와 파편화. 장소의 모더니즘—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한 장소를 반복해서 파고들며 그 장소에서 모더니즘의 언어를 발견한 것. 한국 모더니즘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모더니즘이 있었고, 변시지의 제주화가 보여주는 장소의 모더니즘이 있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개념이 필요하다. 풍토 모더니즘(風土 Modernism). 서양 모더니즘의 형식적 언어—추상, 단순화, 본질의 추구—를 수용하되, 그 언어를 특정 풍토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경로. 변시지의 제주화가 이 개념의 가장 선명한 실례다. 그는 서양 유화의 언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언어를 제주의 풍토 속에서 변형시켰다. 황토색은 서양 인상주의의 색채가 제주의 태양 아래서 변형된 것이고, 갈필의 선은 서양 데생의 문법이 동양 서예의 필법과 제주의 바람 앞에서 변형된 것이다.
단색화와 제주화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전개되었지만, 방향이 달랐다. 단색화가 물질과 행위의 순수성을 추구했다면, 제주화는 풍토와 장소의 구체성을 추구했다. 단색화는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모더니즘의 전부는 아니다. 두 방향이 함께 있을 때 한국 모더니즘은 더 온전해진다.
변시지의 탄생 100주년인 2026년, 이 재조명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한 화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모더니즘의 공식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 서울 중심의 서사에 제주의 풍토를 더하는 것. K-모더니즘의 계보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었던 원류를 복원하는 것.
근대는 서울에서만 오지 않았다. 제주의 황토빛 풍토에서도, 바람과 돌담과 까마귀 속에서도, 40년간 같은 장소를 파고든 한 화가의 캔버스 위에서도 왔다. 그 캔버스 앞에서 그는 혼자였지만, 그의 그림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풍토가 함께 그렸다. 바람이 함께 그렸다. 제주라는 이름의 세계 전체가, 그의 붓끝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