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당미술관 설립에 얽힌 강구범과 변시지의 이야기
바다와 예술의 인연 – 기당미술관에 담긴 두 사람의 이야기
기당 강구범의 배경과 기당미술관 설립
1980년대 중반, 제주 서귀포의 언덕 위에 작고 아담한 미술관 건물이 세워졌다. 기당미술관이라 이름 붙은 이 공간은 강구범 선생이 변시지에 대한 40년전 약속을 지키며 자신의 고향 제주에 기증한 선물이었다. 강구범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재일교포 기업가였다. 한때 공장 화재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를 딛고 일어서 일본 납세 순위 2위를 기록할 만큼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번 돈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고, 변시지의 제안에 따라 말년에 고향을 위해 미술관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제주에 현대적인 미술관을 세워 지역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한 그의 뜻은 확고했다. 서울에도 시립미술관이 없던 시절, 변시지와 강구범은 섬 주민들에게 예술의 집을 선물하며 제주가 대한민국 최초의 공립미술관을 가진 도시가 되도록 만들었다. 강구범은 미술관 건물을 직접 완공한 뒤 아낌없이 서귀포시에 기증했고, 1987년 7월 1일 마침내 기당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예술로 맺어진 강구범과 변시지의 인연
강구범 선생과 변시지 화백의 인연은 고향만큼이나 깊고도 남다르다. 두 사람은 먼 친척지간으로, 강구범은 변시지의 외사촌 형뻘 되는 가까운 어른이었다. 1940년대 말, 이들은 타국 일본에서 예술을 매개로 다시 만났다. 태평양전쟁 직후 혼란스러운 오사카와 도쿄의 미술계에서, 제주 출신이라는 공통점은 두 사람을 자연스레 묶어주었다. 청년 시절의 변시지는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이어가며 “우성” 변시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강구범은 미술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사업가로서 후배 예술가를 따뜻하게 지켜보았다.
1950년 어느 이른 봄날 도쿄, 일본 미술단체 연합전의 개막식장에서 변시지는 천황의 안내자로 나서며 긴장으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때 곁에 있던 강구범이 살며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지, 긴장하지 말게. 자네는 오늘 누구보다 이 전시회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변시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잠시 뒤 히로히토 일왕이 천천히 전시장에 들어섰고. 강구범은 천황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강구범은 변시지의 예술 여정을 곁에서 응원했다. 변시지가 도쿄의 시세이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한 점을 구매하여 자기 집 안방 침대 위에 걸어,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힘들었던 젊은 예술가에게, 선배의 그 한 점 작품 구입은 돈 이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기당미술관과 변시지 작품이 전시되기까지
세월이 흘러 1970년대 중반, 변시지 화백은 오랜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로 내려왔다. 고요한 섬마을에서 그는 문득 떠오르는 빈 공간 하나를 그려보았다. 제주도에 ‘예술의 등대’와도 같은 미술관이 있다면, 후배 예술가들과 아이들에게 어떤 희망이 될까 하고 말이다. 서울 시절 만났던 제주 출신 학생들이 고향을 묻는 말에 부끄러워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문화 시설 하나 없던 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언젠가 제주에 제대로 된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그의 가슴에 싹텄다.
변시지의 이 꿈을 현실로 이뤄준 사람이 바로 강구범이었다. 마침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강구범은 고향에 기여하고픈 마음을 품고 있었다. 강구범은 변시지에게 40년전의 약속을 지키겠으니 소원을 말하라 하였고, 변시지로부터 제주에 미술관을 세우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그는 쾌히 평생 쌓아온 부를 아낌없이 내어놓으며 기당미술관 건립이 시작되었다. 강구범의 아호(雅號)이기도 한 ‘기당(奇堂)’을 딴 이 미술관은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설계와 건축 과정에서 예술가의 안목과 기부자의 의지가 어우러졌고, 1987년 드디어 고향 땅에 현대식 전시관이 우뚝 서게 되었다. 개관식 날, 강구범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라도 내 고향에 보답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변시지 역시 “이제 제주 사람도 미술관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가슴 벅찬 소회를 남겼다.
기당미술관은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강구범은 애초에 이 미술관을 “변시지를 위한 미술관”으로 세웠다고 할 만큼, 그의 작품이 고향에 영구히 전시되기를 바랐다. 개관 이후 미술관 한켠에는 “폭풍의 화가”로 불린 변시지의 대표작들이 늘 걸려 있었다.
예술적 우정으로 빚은 감동의 장면
1987년 여름, 기당미술관이 문을 열던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전시실을 둘러보던 강구범과 변시지 두 사람은 조용히 마주 서서 노을에 물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열린 창으로 살랑이고, 붉은 석양빛이 변시지의 캔버스들 위로 내려앉았다. 강구범은 미술관 정문 옆에 세워진 자신의 흉상을 힐끗 보더니 쑥스럽다는 듯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변시지의 작품 앞에 섰다.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제주 바다를 그린 대작 앞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그림에는 태풍처럼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화가의 혼이 담겨 있었고, 그 그림을 품은 미술관에는 예술을 사랑한 사업가의 마음이 스며 있었다.
강구범은 나직이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이제야 해냈군... 우리 고향에도 이런 날이 와.” 변시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형님 덕분입니다.” 평생 현실과 예술의 거친 바다를 함께 건너온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변시지가 살며시 강구범의 손을 잡았다. 굳은 살 박인 기업가의 손과 물감 얼룩진 예술가의 손이 맞닿는 순간, 기당미술관에 흐르던 공기는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이, 그날 그 자리에서 하나의 결실로 영글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년도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왔다. 해 질 녘의 미술관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고요했다. 강구범은 먼 수평선을 가만히 응시했고, 변시지는 눈앞의 작품들이 풍겨내는 빛을 음미했다. 둘의 머릿속에는 지나온 세월의 그림들이 스쳐갔다. 황무지 같았던 제주에 문화의 씨앗을 심겠다고 다짐하던 순간들, 낯선 이국땅에서 서로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쌓아온 예술과 삶의 이야기들…. 모든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고맙습니다.” 문득 변시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구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더 고맙지.” 미술관 너머로 붉은 태양이 바다에 잠겨들고 있었다. 늦은 바람이 와락 불어와 둘의 흰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먼 옛날 제주 바람이 소년 시절의 그들을 쓰다듬던 기억처럼, 이날의 바람도 두 노인을 부드럽게 감쌌다. 강구범과 변시지,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듯 바람 같은 시간과 바다 같은 세월을 지나 한 채의 미술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주 섬 끝자락에 자리한 기당미술관은, 서로를 아끼고 예술을 사랑한 이들의 우정이 남긴 아름다운 결실로 오늘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