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토 속의 실존: 변시지,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사르트르의 미학적 교차점
서론 · 세 겹의 풍토, 세 개의 목소리
“인간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지리적 좌표를 묻는 것을 넘어, 던져진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탐구한다. 20세기 중반, 이 질문에 세 인물이 각기 답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선언했고,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전후(戰後) 유럽의 트라우마를 캔버스 위의 비명과 뒤틀린 육체로 형상화했다. 한국의 화가 변시지는 제주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 일본의 제국주의, 청년기 서울의 분단과 전쟁, 말년 제주에서의 4·3의 상흔이라는 삼중의 역사적 풍토를 겪으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예술로 탐구했다.
변시지는 일본 오사카 유학 시절 서양화의 아카데미즘 기법을 익혀 1948년 ‘광풍회’ 공모전에서 역대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1975년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와 이후 45년간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이처럼 변시지의 삶은 식민의 제국, 분단의 서울, 학살의 제주라는 삼중의 폭력적 풍토 속을 지나간 여정이었다. 이 세 인물을 하나로 엮는 철학적 키워드는 “풍토(風土)”이다. 일본 철학자 와츠지 데쓰로는 풍토를 단순한 자연환경을 넘어 인간 존재를 둘러싼 총체적 조건으로 보았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상황 속의 자유”임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뒤틀린 인체는 전후 유럽이라는 풍토가 남긴 트라우마의 흔적이며, 변시지의 그림은 제국주의, 전쟁, 학살이라는 세 겹의 풍토를 통과한 그의 실존적 응답이다. 본 글은 변시지 예술을 중심에 두고, 그의 예술세계와 연관된 풍토 개념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다:
- 실존의 조건으로서 풍토는 어떻게 예술적 형식을 규정하는가?
- 전후의 폐허와 폭력이라는 공통된 상황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예술가는 어떻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르게 탐구했는가?
- 변시지는 일본의 아카데미즘, 서울의 전통, 제주 자연이라는 삼중 풍토를 거치며 어떻게 동·서양 기법을 통합하고, 제주의 특수한 소재를 보편적 인간성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는가?
이 글은 위 질문들에 대해 변시지를 축으로 사르트르와 베이컨의 작업을 풍토론과 함께 비교·사유하는 예술철학적 여정이다.
1부: 풍토와 실존의 변증법
1.1 와츠지의 풍토론과 사르트르의 상황 개념
와츠지 데쓰로는 『풍토(風土)』(1935)에서 기후와 지리, 역사로 이루어진 환경이 인간의 사유와 감성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그는 몬순(습윤적 기후)과 사막(극한의 열기)과 목초지(온화한 초원) 등 각기 다른 풍토가 서로 다른 인간성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풍토는 단순한 물리적 배경을 넘어서 사람과 문화의 형태를 길러내는 근원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사르트르의 경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절대적 자유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그는 그 자유가 비연속적 상황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자유를 “‘상황 속의 자유’”로 정의하며, 자유는 다양한 조건에 의해 제약됨을 강조했다. 요컨대, 와츠지의 풍토와 사르트르의 상황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특정한 풍토와 역사를 가진 환경에 태어나며, 그 조건이 우리 행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형성한다. 와츠지가 풍토의 규정성을 강조했다면, 사르트르는 바로 그 풍토 안에서 주체가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갈 가능성(기투project)을 모색한다고 할 수 있다.
1.2 전후 풍토: 폐허 위의 실존
20세기 중반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이념 대립으로 인류 문명이 붕괴된 시기였다. 전통적 가치와 합리성은 무너졌고, 이른바 ‘의미의 공백’ 상황이 조성되었다. 사르트르는 이를 초월적 질서가 사라진 상태, 즉 “신의 죽음” 이후의 상황으로 해석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고, 그 자유는 동시에 깊은 불안과 마주함을 뜻한다. 베이컨은 바로 이 불안을 캔버스에 담았다. 일례로 DailyArt 기사에 따르면, 베이컨은 “어둡고 왜곡된 형상들이 가득한 섬뜩한 세계”를 창조했는데, 이는 그의 트라우마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의 인물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신체는 해체된 듯 왜곡된다. 이 형상들은 단순한 그로테스크가 아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의 시선 앞에 선 인간은 대상화되고 자유가 제한된다. 베이컨은 투명한 상자나 틀 안에 인간을 가두어 마치 감옥이나 도살장의 풍경을 연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타자의 시선이 개인을 짓누르는 폭력을 시각화했다. 전통적 재현을 거부한 그는 “자신의 신경계를 캔버스에 옮기고 싶다”고 말한 바 있으며, 캔버스 위에 폭력의 흔적을 직접 그려 넣음으로써 관람자가 그 고통을 직시하도록 하는 ‘증언의 미학’을 택했다.
1.3 변시지의 삼중 풍토: 폭력의 지층학
프랜시스 베이컨이 단일한 전후 유럽의 트라우마에 반응했다면, 변시지가 겪은 풍토는 세 겹의 폭력이 층층이 쌓인 지층과도 같았다.
제국의 풍토 (일본)
변시지는 6세에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데라우치 만지로에게 사사받으며 서양 근대 미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1948년 22세의 나이에 일본 최고 권위의 공모전인 ‘광풍회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러나 그 성공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당시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일본인의 기질과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린다고 평할 만큼, 화려한 기술 너머에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드러났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결국 그를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1957년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미술계에서 인정받았지만 정체성의 불일치와 강렬한 폭력의 시대상을 동시에 체감한 시기였다.
분단의 풍토 (서울)
해방 후 귀국한 변시지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일본 유학파라는 이유로 동료들의 질시를 받으며 1년 만에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는 창덕궁 후원(비원) 주변을 무대로 비원파(秘苑派)로 활동하며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장르를 바꿔 한국적 아름다움을 탐색했다. 예를 들어 「가을 부용정」은 기왓장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여전히 일본에서 익힌 서양 화풍의 잔재를 담고 있었다. 어두운 전쟁 폐허와 이념 대립의 시대에 그는 평온한 전통 공간을 그리면서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너머 사회의 깊은 분열과 좌절을 체감해야 했다.
학살의 풍토 (제주)
1975년, 변시지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둔 채 ‘쫓겨나듯’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그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국가 권력의 폭력적 학살의 기억과 마주했다. 친지들과 이웃의 희생 소식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제주일보 해설에 따르면, 변시지는 제주의 황토빛 화면에 “4·3으로 핏줄을 잃은 자의 슬픔과 제주인들의 근원적인 비애”를 담아냈다. 곧이어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배경을 넘어, 진실이 은폐되고 죽음마저 침묵된 ‘강제된 침묵의 풍토’로 그의 그림 속에 체화되었다.
이렇게 제국주의, 분단, 학살이라는 삼중의 폭력적 풍토를 통과한 변시지의 예술은, 그 다층적 트라우마를 증언하고 치유하려는 실존적 응답이었다.
2부: 두 개의 형식, 두 개의 응답
극한의 풍토 속에서 베이컨과 변시지는 각기 다른 형식 전략으로 실존의 의미를 탐색했다.
2.1 프랜시스 베이컨: 폭력이 새긴 육체의 비명
베이컨의 캔버스는 관람자에게 불안을 안긴다. 그의 인물들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살갗은 늘어지고 해체된 듯 뒤틀린다. DailyArt가 지적했듯, 베이컨의 트라우마는 “어둡고 왜곡된 형상들로 가득한 섬뜩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투명한 상자나 철창에 갇혀 있는데, 이는 마치 감옥이자 도살장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감금된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 아래 완전히 대상화된 상태를 드러낸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자의 시선에 포박된 주체는 스스로의 자유가 제한된 채 객체로 나타난다. 베이컨은 전통적 재현을 배제하고 “신경계 전체를 캔버스에 옮기려”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겪은 폭력과 불안을 육체에 아로새기고, 이를 통해 관람자가 직접 고통을 체감하도록 하는 폭로와 증언의 미학을 택했다. 그의 그림에서 비명 짖는 머리와 찢겨진 신체는, 전후 유럽이라는 풍토가 새긴 잔혹한 흔적을 상징한다.
2.2 변시지: 삼중 풍토를 통과한 예술적 변모
변시지는 베이컨과는 반대로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본·서울·제주를 거치며 전수받은 요소들을 융합하고, 폭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원형을 모색했다.
일본 (습득)
변시지는 일본 유학 시절 서양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철저히 습득했다. 특히 데라우치 만지로 문하에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기법을 연마했고, 1948년 광풍회전에서 네 점의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엄격한 훈련은 훗날 형식 해체와 재구성의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서울 (재발견)
귀국 후 서울에서는 창덕궁 후원 풍경을 그리며 한국적 전통과 동양적 감수성을 재발견했다. 그는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옮겨가며 빼곡한 기와지붕과 전통 건축에 한국의 미학을 담았다. 서양 기법(일본 유학)과 동양 정신(서울의 역사적 공간)이 충돌하고 충돌하면서, 새로운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 (통합과 승화)
1975년 제주에 정착하면서 예술적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다. 그는 제주의 폭풍과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랑말, 까마귀, 초가집, 돌담과 같은 구체적 소재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제주 돌담은 ‘파도와 비, 햇빛과 짠내를 똑같이 견디며’ 쌓인 돌들의 연속으로, 그 위 까마귀들은 같은 바람을 맞으며 ‘이름 없는 평등’을 이룬다고 그는 기록했다. 초가집과 소나무는 풍토를 견디는 고독한 거처이자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풍부한 지역적 상징을 통해 변시지는 제주도의 거친 풍토와 사람들의 운명을 서사화했다.
변시지 예술의 형식적 완성은 제주의 독특한 상징들과 함께 “황색 바탕과 먹선”으로 구현되었다. 황색은 서양화의 전통적 캔버스 바탕이자 한국 전통의 황토색(대지의 색)이며, 모든 이념적 대립을 초월한 생명의 공간을 의미한다. 먹선은 동양 수묵화·서예의 핵심 기법이지만, 변시지는 이를 서양적 공간 구성과 결합했다. 그의 선은 단순한 윤곽이 아니라 대상의 기(氣)와 리듬을 담는 생동적 움직임이다. 실제로 변시지는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세계가 온통 아열대 태양 아래 노랗게 보였다”고 회고하며, 황토색을 고유색으로 삼았다. 그는 “천지현황(天地玄璜): 玄은 하늘의 색, 黃은 땅의 색”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색채 선택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를 시각화하려는 시도였다. 평론가들이 ‘평등원’이라 부른 그의 세계는, 베이컨의 격렬한 색채 충돌과 달리 황색과 흑색이 어우러져 일종의 일체감을 만든다. 이 형식적 조합은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치유와 재생을 향한 변시지의 실존적 선택이었다.
2.3 형식의 완성: 황색과 먹선, 동서양의 통합
변시지는 동·서양 기법의 변증법적 통합을 통해 자신만의 형식 언어를 구축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황토색을 “무한한 공간과 이야기, 꿈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보고, 제주 바다와 땅의 원초적 힘과 인간 의지를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 한편 검은 먹선은 동양인의 정신과 혼을 담아내는 가장 ‘동양적이고 편안한 색’으로 여겼다. 그는 형식적으로 서양화의 색채성에서 벗어나, 수묵화의 간결함과 동양적 미학을 결합했다. 실제로 변시지는 종착점에서 “천지현황(天地玄璜) – 검은 현(玄)은 하늘의 색, 누를 황(璜)은 땅의 색”이라는 색채론을 확립했다. 이러한 형식은 모든 사물을 하나의 색으로 통합하는 ‘무차별의 세계’, 즉 평등원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베이컨이 색채의 충돌로 불안과 긴장을 조성했다면, 변시지는 황색과 흑의 조화로 일체감을 만들며 포용과 치유의 미학을 선택했다.
3부: 자유의 한계와 가능성
3.1 극복의지: 상황을 초월하는 기투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란 제약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진 제약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식이 단순히 현재의 사실성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향해 ‘기투(project)’해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전후 유럽의 트라우마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왜곡된 육체 형상으로 능동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응답했다. 변시지에게도 삶 자체가 ‘극복 의지’였다. 그는 제국주의와 분단이라는 극한의 제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식민지 억압 아래 서양 화풍을 연마했고, 전쟁 폐허 속에서도 조용한 아름다움을 그렸으며, 4·3의 침묵 속에서 생명의 원형을 그려냈다. 제주의 강풍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소나무처럼, 그는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유연한 극복 의지를 보여주었다.
3.2 고독과 연대: 베이컨의 고립과 변시지의 연결
사르트르의 초기 사상은 ‘타인은 곧 지옥’이라는 경구로 대변되듯 개인의 고독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예술 역시 이 고독한 개인을 그린다. 그의 인물들은 항상 혼자이며, 각자의 고통 속에 갇혀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연출한다. 변시지의 그림에도 고독은 등장하지만, 그 결은 베이컨과 다르다. 황량한 제주 들판에 외롭게 선 조랑말과 초가집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드러내지만, 이들은 대지에 발붙이고 바람을 맞으며 풍토의 일부로 이어져 있다. 가령 변시지는 돌담이 ‘수없이 쌓인 돌들’로 이루어져 서로 이어지듯, 개인의 영역을 나타내는 돌담이 연결돼 마을 공동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즉 그의 고독은 멀리 외면당한 고립이 아니라, 대지와 바람과 더불어 존재하는 ‘연결된 고독’이다. 변시지는 개인의 고독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 회복을 지향한다. 이는 사르트르 후기의 사유처럼, 개인과 집단의 긴장적 관계를 함께 시각화하는 것이다.
3.3 지역성에서 보편으로: 특수성의 승화
변시지 예술의 위대한 성취는 『지역성의 보편화』이다. 제주도 조랑말이나 돌담 같은 소재는 가장 특수한 지역적 이미지다. 그러나 변시지는 이 특수성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다다랐다. 사르트르도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변시지의 그림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척박한 바람을 견디는 제주 조랑말은 ‘모든 생명이 맞서는 시련에서의 인내’를, 거센 제주 폭풍은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고난’을 상징한다. 앞서 인용했듯 그의 황토빛에는 4·3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과 제주인의 운명이 녹아 있다. 변시지는 제주의 특수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심화함으로써, 오히려 모두에게 공명하는 예술 언어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서양 기법을 아우르는 형식 언어, 즉 황색 바탕과 먹선을 통해 지역적 이야기를 세계적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결론: 풍토 위에 선 자유
이 글은 변시지, 베이컨, 사르트르라는 세 인물이 ‘풍토’와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교차적으로 다루었는지 살폈다. 삼중의 폭력이 남긴 전후의 폐허라는 공통 풍토 앞에서 사르트르는 사유로 응답했고, 베이컨과 변시지는 각기 다른 형식으로 응답했다. 풍토는 우리를 규정하지만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 베이컨은 유럽의 트라우마를 육체의 비명으로 증언했다. 변시지는 제국주의·전쟁·학살이라는 ‘삼중의 풍토’를 지나며, 고통을 재현하기보다 극복 의지와 생명의 재생을 선택했다. 그의 예술은 자유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보여준다. 첫째, 황색과 먹선이라는 통합된 색채 체계를 통해 동·서 이분법을 넘는 제3의 길을 열었다. 둘째, 철저한 지역성 파고들기를 통해 특수한 경험이 보편적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기후 위기와 디지털 소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풍토와 마주한다. 이런 압도적 상황 앞에서 변시지의 예술은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진다. 베이컨의 그림처럼 절망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변시지의 조랑말처럼 뿌리 깊은 땅 위에 서서 폭풍을 견디며 극복할 것인가.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답하자면, 인간은 풍토 위에, 역사 속에, 육체 안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조건들을 넘어서는 움직임, 즉 자유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변시지의 예술은 풍토에 뿌리박은 채 이를 초월하려는 이 위대한 실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시대의 폭풍을 삼킨 화가: 변시지의 예술과 실존
"시대상황이 한 화가를 완성했다"는 통찰은 변시지 화백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그의 삶은 식민지(정체성의 상실), 2차 세계대전(파괴), 6.25 전쟁과 냉전(이념 대립과 분단), 그리고 4.3사건(내재된 상처)이라는 20세기 한민족의 고난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가 내렸던 예술적 결정들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닌, 생존과 실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1. 시대의 혼돈과 '구상(具象)'의 필연성
변시지 화백이 활동하던 1950~70년대 한국 화단은 서구의 추상미술, 특히 '앵포르멜(Informel, 비정형 추상)'이 휩쓸고 있었습니다.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젊은 작가들에게, 기존의 형상을 파괴하고 격렬한 물성과 행위로 내면의 상처를 토해내는 추상 작업은 시대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변시지는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구상'을 고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대적 역행이 아니라,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필연적 선택이었습니다.
이유: '추상'을 넘어선 '현실'의 압도성
앵포르멜이 '파괴'와 '혼돈'을 표현하려 했다면, 변시지에게는 그가 겪은 현실 자체가 이미 파괴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식민지 소년으로 겪은 2차 대전의 공포, 귀국 후 마주한 6.25의 폐허와 이념 대립은 이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 부조리'의 극치였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혼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돈의 폐허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존재'하는 무언가를 붙잡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 '말', '나무' 같은 구체적인 '형상(구상)'이었습니다.
결론: 구상은 '휴머니즘'의 마지막 보루
모든 것이 파괴되고 이념으로 인간이 대체되는 시대에, 그가 고집한 '구상'은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이자,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존재를 긍정하려는 실존적 태도였습니다. 그의 구상은 단순한 재현이 아닌, 시대의 폭력에 맞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도구였습니다.
2. 정체성의 탐색과 '비원(祕苑)'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가 마주한 서울은 6.25 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식민지인'으로 자란 그에게 '조국'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착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유: 상실된 '원형(原型)'에 대한 갈망
그의 청년기는 '일본(타자)' 속에서 '조선인(자아)'이라는 정체성의 혼란기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이념 대립 속에서 '조국'의 순수한 원형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비원(창덕궁 후원)'은 그에게 식민과 전쟁으로도 훼손되지 않은 '조선(한국)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비원의 고궁과 정자는 서구화나 식민지화 이전의,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이자, 그가 찾고자 했던 정체성의 뿌리였습니다.
결론: '비원'은 정신적 귀향지
폐허(전쟁)와 혼란(냉전)의 한복판에서, '비원'은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귀향지였습니다. 그는 비원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며 식민지 청년으로서 상실했던 자신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스스로 재구축하려 했습니다.
3. '풍토(風土)'로서의 제주: 실존의 무대
1975년,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주로 향합니다. 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닌, 그의 삶을 완성하는 운명적 귀결이었습니다.
이유: 내면의 폭풍과 '풍토'의 공명(共鳴)
그가 제주에서 마주친 '풍토'는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친 바람, 검은 현무암, 고립된 섬이라는 원시적이고 가혹한 환경이었습니다.
이 제주의 '풍토'는 그가 평생 겪어온 시대적 시련(식민, 전쟁, 이념)의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었습니다.
- 거친 바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아쳤던 20세기 역사의 폭력(전쟁, 식민 통치) 그 자체였습니다.
- 검은 현무암: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상처(4.3의 비극, 6.25의 폐허)의 응축물이었습니다.
- 고립된 섬: 일본에서도, 서울에서도 이방인이었던 그가 느낀 '고독'의 궁극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결론: '풍토'는 운명이자 실존의 무대
제주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 풍경(시대적 트라우마)과 정확히 일치하는 외부 세계(제주의 풍토)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 가혹한 풍토에 맞서거나 도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견뎌내는 인간과 말을 그립니다.
제주의 풍토는 그에게 '운명' 그 자체였으며, 그 운명 속에서 고독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실존의 무대'였습니다.
종합 결론
변시지의 예술 여정은 '정체성의 탐색(비원)'에서 시작하여 '실존의 증명(제주)'으로 완성됩니다.
-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혼돈 속에서 그는 추상이 아닌 '구상(인간)'이라는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습니다.
- 폐허가 된 서울에서 그는 '비원(전통)'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뿌리, 즉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 그리고 마침내 '제주(풍토)'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겪어온 시대의 폭력과 고독이라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냈습니다.
결국 그가 제주에서 그린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식민, 전쟁, 분단이라는 20세기의 폭풍우를 온몸으로 삼키고도 꿋꿋이 서 있는 한 인간의 실존,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변시지(邊時志)
시대의 경계에 선 이름
변두리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바람과 흙의 숨결이 있었다.
붓을 들고,
말을 삼키고,
오랜 침묵 속에서
그는 시대를 가로질렀다.
1.토착적 모더니즘의 선구자, 변시지
2.유학과 근대적 감성의 형성
3.덕수궁 비원에서의 한국적 자연미 탐구
4.1975년, 제주 정착과 예술적 대전환
5.황토와 먹선이 직조하는 조형 세계
6.절제와 환원의 미학
7.풍토를 통한 조형 철학의 구현
8.역사와 삶의 감각을 담은 무서사적 표현
9.지역성과 보편성의 변증법적 통일
변시지(1926~2013)는 흔히 ‘폭풍의 화가’라 불립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황토빛 바탕 위에 거칠게 휘갈긴 검은 선, 바람에 휘청이는 나무와 파도, 그리고 그 속에서 버티는 인간과 동물들. 그것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제주의 바람과 돌, 바다와 같은 풍토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의 그림이 제주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제주의 바람을 직접 맞아본 적이 없어도, 그의 화폭 앞에 서면 누구나 인간의 고독과 투쟁, 그리고 삶의 끈질긴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변시지의 예술은 ‘풍토성의 보편화’라는 독창적 성취를 보여줍니다.
세계미술사 속에서 지역성과 보편성의 결합은 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고흐가 아를의 해바라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격정을 드러냈고, 모네가 지베르니 정원의 빛을 통해 자연의 보편성을 탐구했듯이, 변시지는 제주라는 섬의 풍토를 통해 인간 실존의 보편성을 형상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조금 달랐습니다. 서양의 유화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동양 수묵화의 정신을 결합했고, 그 결과 황토와 흑색의 대비라는 독창적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제주를 그렸지만, 제주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제주의 바람은 곧 인간이 맞서는 운명의 폭풍이 되고, 제주 바다는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무대가 됩니다. 변시지의 화폭은 특정한 지역의 풍토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인류 보편의 정서로 확장되는 것이죠.
오늘날 그의 작품은 제주 기당미술관은 물론,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도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변시지가 단순히 한국의 지역 화가가 아니라, 세계미술사 속에서도 독창적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임을 보여줍니다.
맺음말
변시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한 섬의 풍토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람, 돌,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그것은 제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변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세계와 만났습니다.
오사카 미술학교에서의 유학 (1940년대)
변시지(Byun Shi Ji, 1926–2013)는 제주 출생으로 6세 때 일본으로 이주하여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오사카 미술학교(현재 오사카예술대의 전신)에 입학하여 서양화과(유화 전공)를 졸업했는데, 1945년에 해당 학과를 마쳤다. 오사카 미술학교는 1945년 “히라노 영학숙”으로 설립되어 1957년 “오사카 미술학교(大阪美術学校)”로 개칭된 사립 미술교육 기관으로, 훗날 1960년대에 대학으로 승격되어 오사카예술대학교의 뿌리가 되었다. 당시 오사카 미술학교의 교과 과정은 도쿄미술학교 등 일본의 근대 미술교육 체계를 본받아 서양식 아카데믹 미술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개설한 구로다 세이키는 학생들에게 사체해부학, 누드 모델 데생, 실외 사생(plein air) 등을 필수 과목으로 편성했는데, 이러한 사실주의 기초훈련과 인체 공부 전통이 오사카 미술학교에도 이어져 학생들이 엄격한 소묘와 유화 기법을 연마하도록 했다. 변시지 역시 재학 시절 이러한 아카데믹 미술 교육 환경 속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비록 1940년대 중반은 태평양전쟁 말기와 패전 직후의 혼란기였지만, 변시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광복 소식도 일본 현지에서 맞이할 정도로 전쟁기 내내 일본에 체류하며 수학했다. 졸업 직후에는 동경(東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공부하기도 했는데, 이는 서양 미술사와 미학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변시지의 일본 유학 시기는 일제 말기에서 전후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이루어졌지만, 그는 일본 미술학교의 체계적 커리큘럼과 교사들로부터 서양화 기법을 충실히 익혀 훗날 작가로서 성장할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학 시절의 전시 활동과 평단의 반응 (1940~50년대)
변시지는 학생 신분이던 1940년대 후반부터 각종 공모전과 전시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47년 그는 제33회 광풍회전(光風会展, 광풍회 미술전)에서 입선하여 주목받았고, 이듬해인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는 최고상(大賞)을 수상하며 "광풍회전 사상 최연소 수상자"로 기록되었다. 광풍회는 일본의 대표적 서양화가 단체로, 후지시마 다케지 등이 주도한 전람회였다. 변시지가 이끌어낸 쾌거는 일본 미술계에서도 놀라운 일이었으며, 특히 한국인 유학생이 거둔 성취로서 의미가 컸다. 실제로 그는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미술전람회(日展)에서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다. 광복 직후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 미술계 주류가 일본인인 상황에서, 변시지는 비(非)일본인으로서 이러한 권위 있는 미술전에서 상을 받으며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유학생을 비롯한 조선인 미술가들의 전시 활동이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도쿄나 오사카 등지의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고, 전후에도 이들 가운데 다수가 일본 미술전 등에 참여했다. 변시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조선인 특유의 감수성과 탄탄한 기법을 겸비한 작품을 선보여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얻었다. 일본 평단은 그의 작품에 담긴 남다른 색감과 기교에 주목했고, 조선 출신이라는 배경도 함께 조명되었다. 실제로 변시지는 1949년 광풍회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정도로 일본 화단에서 인정받았으며, 동경 시세이도(資生堂)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9년 도쿄 시세이도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51년 동경에서 2회 개인전, 1953년 오사카 한큐 백화점 양화화랑에서 3회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전시 경력을 쌓았다. 이러한 전시들은 일본 미술계에서 신진 화가 변시지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특히 조선인 유학생들의 그룹전이나 국제학생 교류전 등에도 변시지의 출품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일부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전후 일본에서 외국인(구 식민지 출신) 미술가들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미술 평론가들은 “이국적 정서와 탄탄한 데생력이 결합된 변시지의 작품이 신선하다”는 식의 호평을 남기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1940~50년대 변시지의 전시 활동은 일본 미술계의 주류 무대에 한국인 화가가 진출한 사례로, 그의 수상 경력과 전시회들은 당시 미술 잡지와 언론에 긍정적으로 언급되며 비일본인 학생 작가들에 대한 담론을 촉발시켰다. 이는 해방 후 초기 재일 한국인 예술가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 일본 회화계의 거장들과 학풍의 영향
변시지가 유학하던 당시, 일본 미술계에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清輝)와 테라우치 만지로(寺内萬治郎)와 같은 선배 격의 거장들이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아카데믹 서양화 전통을 세우고 발전시킨 인물들로, 변시지를 비롯한 후배 세대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구로다 세이키(1866–1924) 구로다는 일본 근대 서양화의 개척자로, 프랑스 유학을 통해 배운 외광주의와 인상주의 기법을 일본에 도입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 근대 서양화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현대 일본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6년에는 도쿄미술학교에 서양화과를 창설하여 초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체계적인 서양화 교육과정을 수립했다. 구로다는 학생들에게 야외 사생과 누드 크로키,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사실적인 인체 표현과 색채 연구를 강조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 회화계에 근대적 아카데미즘을 정착시켰다. 그의 대표작인 〈호수 기슭〉이나 〈무희〉, 그리고 〈마이코〉등은 밝은 색조와 빛의 변화, 사실적 인물 표현으로 당시 일본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구로다의 이러한 혁신은 곧 일본 미술계의 옛 보수파와 신진 세력 간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밝은 팔레트와 외광 묘사 기법은 후학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변시지의 세대가 미술을 공부할 무렵에는 구로다가 이미 고인이었지만, 그가 확립한 교육 방식과 미학적 지향은 여전히 일본 미술학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변시지를 가르친 교수들 역시 구로다의 제자 계열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구로다 류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와 유럽 유학파 전통이 변시지의 배움 속에 녹아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로다 세이키의 서구적 기법 도입과 일본적 정취의 융합 노력은 변시지를 비롯한 동시대 유학생들에게 “동양인으로서 서양화를 하는 법”에 대한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테라우치 만지로(1890–1964) – 테라우치는 구로다의 뒤를 이은 일본 아카데믹 서양화의 거목으로 꼽힌다. 오사카 출신으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으며 (재학 중 구로다 세이키와 후지시마 다케지 모두에게 배웠다), 졸업 후 관전에 꾸준히 출품하며 일본 미술계의 중견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나부(裸婦) 화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여성 누드상을 즐겨 그려 “나부의 테라우치”, “나부를 그리는 성자” 등의 별칭으로 불렸다. 1930년대에 사이타마현 우라와에 정착한 이후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자신의 문하생들과 무사시노회라는 연구 모임을 결성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온화하고 차분한 색조, 견고한 데생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고전적 안정감 속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인체를 묘사하는 뛰어난 소묘력과 은은한 살색 표현이 돋보이며, 그는 “일생 동안 파리의 벽을 사랑한 우트릴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일본 여성의 누드에 평생 애착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나부 표현에 몰두했다. 테라우치는 프랑스 화가 코로(Corot)의 수수한 색감과 드랭(Derain)의 형태감에 매료되어 그런 요소들을 자기 그림에 흡수했고, 궁극적으로 건강한 피부빛의 일본 여성 누드를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묘사하는 자신만의 양식을 완성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를 통해 일본 관전(帝展/日展)과 미술원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며 1950년대에도 일미전(일본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운영위원, 일본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여 일본 화단의 원로 거장으로 추앙받았다. 변시지의 유학 시기(1940년대 후반~50년대 초반)에 테라우치는 활발히 작품활동과 지도를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젊은 변시지를 비롯한 후배 서양화가들은 그의 전시에 찾아가거나 화보를 통해 누드 묘사의 대가를 접했다. 테라우치 만지로가 보여준 탄탄한 인체표현과 점잖은 색채미학은 변시지를 비롯한 동시대 서양화가들에게 기교와 품격의 모범이 되었고, "학풍(學風)"으로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변시지는 일본 유학 후반기에 광풍회전 등에서 누드에 가까운 인물화로 수상한 바 있는데, 이는 테라우치류의 화풍과 맥이 닿아 있다. 이렇게 구로다 세이키로 대표되는 개척 세대와 테라우치 만지로로 대표되는 아카데믹 세대의 존재는 변시지의 유학 시절 배경이 되는 일본 미술계의 지형을 형성했으며, 그의 작품세계에도 직접적인 양식적·정신적 토양이 되어주었다.
서구 미술계의 시각: 1940~50년대 일본 회화와 아시아 유학생
변시지가 활약하던 1940~50년대에 서구 미술계는 일본의 아카데믹 회화에 대해 다소 복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당시 서구의 미술 관심사는 추상미술 등의 새로운 흐름에 쏠려 있었고, 일본의 전통미술(예컨대 판화)이나 전위예술에 대한 흥미는 높았지만 일본의 서양화단에서 나온 아카데믹 회화는 독창성 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 사례를 보면, 1950년대 초반 서구에서는 일본의 근대 목판화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서양화단에서 일본의 유화 작가들보다 판화가들이 더 두각을 나타낸 현상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일본인 판화가 사이토 키요시(斎藤清)는 1951년 제1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목판화 <염원의 눈>으로 상파울루 비엔날레 판화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는 “회화 부문에서 일본 작가가 상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일본 미술계의 예측을 뒤엎은 결과였다. 이 일로 사이토를 비롯한 일본 창작판화(sōsaku-hanga)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사이토는 1956년 미국 국무성과 아시아재단의 후원으로 미국과 유럽 순회전까지 열게 되었다asia.si.edu. 이러한 사례는 서구 미술계가 전통 회화 매체인 유화보다 일본적 개성이 드러나는 판화나 독자적 현대미술에 더 호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미국 타임지 역시 1951년 사이토 키요시를 “무명에 가까운 일본 판화가”로 소개하면서 그의 목판화 작품 〈고양이〉를 컬러로 게재하였고, 전 세계에서 판화 주문이 쇄도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만큼 서구에서는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그리는 유화보다는 일본 특유의 미감이나 기법이 묻어난 작품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유학한 아시아 출신 화가들에 대한 서구의 시선도 존재했다. 변시지처럼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화가들의 경우, 1950년대 이후 자국에서 활동을 재개하며 서구 미술계와 접점을 늘려갔다. 이들은 일본식 아카데믹 수업을 받은 덕에 서구 미술언어에 능숙하면서도 동양인의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 비춰졌고, 서구 평론가들은 이들의 작품에서 동양과 서양의 혼합된 양식을 읽어내곤 했다. 다만 1950년대 당시 서구의 주요 미술 저널이나 평론에서는 일본이나 한국의 사실주의 서양화가들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았고, 오히려 195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의 전위미술 그룹(예컨대 구타이(Gutai) 등)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1957년 프랑스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é)가 직접 방일하여 일본 추상미술을 소개한 일은 서구 미술계의 관심사가 급격히 일본의 모더니즘/아방가르드로 이동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로 인해 정통 아카데믹 화풍을 걷던 일본 화가들은 상대적으로 국제 무대에서 주목도가 낮았다. 예를 들어 1952년 일본이 전후 처음 참여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일본관에는 주로 원로 화가들과 아카데믹 화풍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는데en.wikipedia.org, 서구 평단은 이를 전통 회화 위주의 보수적 출품으로 평가하며 큰 반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1950년대 말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에 일본 추상화가들이 나오고 나서야 서구 언론의 조명이 본격화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럼에도 일본 회화 전반에 대한 서구의 비평과 수용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953년에는 미국에서 “일본 회화와 조각 걸작전”이라는 대규모 순회전이 개최되어 워싱턴과 시카고 등지의 미술관에 일본 미술을 소개했는데, 이는 냉전기 문화외교의 일환으로 존 D. 록펠러 3세 등이 주도한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는 일본의 전통미술품뿐 아니라 근대 회화작품도 함께 선보여 서구 관람객들에게 일본 미술의 연속성을 알렸다. 서구 평론가들은 이 전시를 통해 일본 화단의 수준 높은 기량을 확인하면서도, 일부는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여전히 유럽 미술의 모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 미국 평론지는 “일본 화가들의 기교는 뛰어나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그들이 서양 기법을 자기 문화와 융합시킬 때 나온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즉 서구에서는 일본과 아시아 화가들에게서 동양적 개성을 기대하면서, 순수히 유럽풍에 머무르는 작품에는 다소 인색한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변시지를 포함한 아시아 유학생 출신 화가들이 서구 미술계에 직접 이름을 알리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이들이 모국 미술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성과를 낼 경우 간접적으로 서구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요약하면, 변시지의 유학 당시 서구의 시각은 일본의 아카데믹 회화에 대해서는 제한적이었으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미술 전반에 대한 호기심은 높아져 가는 추세였다. 특히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등 아시아 작가들은 서구에 독자적으로 소개되기보다는, 일본 미술의 일부로 묶이거나 자신들의 조국에서 열린 국제전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명받았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서구 미술계가 일본의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변시지 세대가 구축한 동서양 혼합 양식도 뒤늦게 재평가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이는 훗날 변시지의 작품 일부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등에 소장되고 국제전에 초청되는 등의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변시지의 일본 유학 시기는 동아시아 미술가들이 서구 미술을 학습하던 단계였고, 그의 활동은 일본 미술계 내부의 성취에 머물렀지만, 그 토대는 차후 한국 현대미술 발전과 국제적 접속에 기여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인용
About Byun Shiji - jeju weekly
http://www.jejuweekly.net/news/articleView.html?idxno=6193
BYUN SHI-JI (b. 1926) | Christie's
https://www.christies.com/en/lot/lot-2442636
Modern artist Byun Shi-ji offers comfort revealing severe loneliness ...
https://www.koreaherald.com/article/2455627
Osaka University of Art - wiki34.com
https://no.wiki34.com/wiki/Universidad_de_arte_de_Osaka
https://en.wikipedia.org/wiki/Kuroda_Seiki
BYUN SHI-JI (b. 1926) - Christie's
https://www.christies.com/en/lot/lot-2442636
https://www.ganaart.com/wp-content/uploads/2020/11/Shiji-Byun_CV.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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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The Invention of Korean Modern Art: How Japan promoted Western culture in its colony
https://www.academia.edu/79009072/The_Invention_of_Korean_Modern_Art_How_Japan_promoted_Western_culture_in_its_col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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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Kuroda_Se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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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obunken.go.jp/kuroda/gallery/english/life_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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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ko (apprentice geisha) - e-Museum
https://emuseum.nich.go.jp/detail?langId=en&webView=&content_base_id=100326&content_part_id=000&content_pict_id=0
https://en.wikipedia.org/wiki/Kuroda_Se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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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de - TERAUCHI Manjiro — Google Arts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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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TŌ Kiyoshi - National Museum of Asian Art
https://asia.si.edu/explore-art-culture/interactives/reading-japanese-prints/saito-kiy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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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sia.si.edu/explore-art-culture/interactives/reading-japanese-prints/saito-kiyoshi/
A Letter From The Publisher: Feb. 10, 1967 | TIME
https://time.com/archive/6634900/a-letter-from-the-publisher-feb-10-1967/
[PDF] PAINTINGS EMERGED:1 THE GUTAI ART ASSOCIATION IN THE ...
https://contents.artplatform.go.jp/wp-content/uploads/2023/02/APJ_202203_Tatehata1985.pdf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pavilion
Press Releases from 1953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 표지 (공익재단 아트시지, 2021).
- 출판 정보: 황학주 시인의 예술산문집 **『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은 2021년 공익재단 아트시지(Art Shiji)에서 초판 발행되었다. 43편의 산문과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수록한 93쪽 분량의 아트북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2022년 1월 PDF 전자책으로도 출간되었다 (ISBN: 979-11-976286-0-3 / 979-11-976286-1-0(전자책))
- 작품 개요 및 주요 내용: 이 책은 제주 출신 변시지(1926~2013) 화백의 그림 43점을 보고 황학주 시인이 느낀 바를 글로 풀어낸 산문 모음집이다. 각 산문의 제목이 곧 해당 그림의 제목으로, 기다림, 태풍, 제주 해녀, 절망, 서귀포 등 제주의 자연 풍광과 삶을 담은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황학주는 그림 한 점 한 점에서 포착한 정서를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메시지로 확장한다. 예를 들어 1985년 작 그림「기다림」을 보고 쓴 글에서는 “삶의 첫번째 원칙은 기다림이며 기다림은 기다림 다음에도 기다림”이라는 통찰을 끌어내어 기다림의 의미를 사색한다. 이처럼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와 분위기를 시인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 문학적 형식과 구성: 형식적으로는 운문 시가 아닌 산문 형식의 글들이며, 그림과 글이 짝을 이루는 예술 산문집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을 ‘산문화집’이라고 칭하며, 산문(散文)과 화집(畫集)의 결합이라는 성격을 강조했다. 전체 구성은 43편의 산문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은 것이며, 각 산문은 독립적이면서도 모두 변시지의 그림에 대응되는 짧은 글이다. 목차에서 보이듯 각 글의 제목이 곧 그림 제목이므로 그림 감상의 순서를 따라 글이 배열되어 있다. 한 편 한 편이 산문시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비록 형식은 에세이 같지만, 내면에는 시적인 운율과 울림이 살아있는 구성을 보인다.
- 변시지와의 관계: 이 산문집 자체가 변시지 화백에 대한 헌정이라 할 수 있다. 황학주 시인은 변시지의 작품 한 점 한 점에서 받은 영감과 정서를 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화가와 교감을 시도했다. 실제로 황학주는 제주 이주 후 기당미술관의 변시지 상설전시관을 자주 찾고 손님들에게도 소개할 정도로 변 화백의 그림에 친숙했으며, 이러한 개인적 애호가 결국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책 속 모든 글은 변시지의 그림이 매개인 만큼 화가의 삶과 예술혼이 배어 있다. 예컨대 화가의 1985년 작 「기다림」이 전하는 고독과 인내를 시인은 “삶의 첫번째 원칙은 기다림”이라는 문장으로 응축했고, 1993년 작「위로」를 보고는 “죽을 것 같을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화답했다. 이렇듯 황학주의 글은 변시지의 그림에 담긴 정서와 메시지를 거울처럼 비춰주며, 화가의 작품 세계와 시인의 사유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 시적·미학적 특징: 황학주의 문장은 회화적 이미지와 시적 언어가 어우러진 점이 특징이다. 변시지 특유의 황톳빛 색감과 거친 풍경, 폭풍과 바다, 그리고 폭풍 앞에 서 있는 삐쩍 마른 고독한 남자의 형상이 글 속에 그대로 되살아난다. 예를 들어 “노란색 화풍”과 “폭풍 앞에 서 있는 남자”와 같은 그림의 인상적인 소재들이 시인의 비유와 묘사로 재현되고, 돌담 위의 까마귀나 해녀 같은 제주적인 상징들이 자주 등장한다. 전반적인 정서는 쓸쓸함과 고독, 허무의 정조가 짙게 깔려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포착하는 서정성이 돋보인다. 한 평론가는 황학주의 시 세계를 두고 “미학주의와 허무주의의 찬란한 융합”이며 “독거(獨居)의 아름다운 높이와 깊이”를 보여준다고 평했는데, 실제로 이 산문집에서도 황량한 풍경 속에 녹아있는 깊은 고독을 아름답게 승화하는 시인의 미학을 확인할 수 있다. 문체는 대체로 담담하고 명징한 서술 속에 간결한 철학적 어구를 담는 심플하면서도 울림 있는 스타일로, 때때로 같은 어구를 반복하거나 대비시키며 여운을 남긴다 (앞서 인용한 “기다림”이라는 단어의 반복 등). 이러한 언어적 절제와 함축을 통해 그림이 전하는 여운을 글로서 효과적으로 구현한 점이 돋보인다.
- 감상 포인트 및 문학·예술적 의의: 그림과 문학의 만남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독자는 책에 실린 변시지의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에 대응하는 황학주의 글을 읽음으로써,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시너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림이 품은 색감과 분위기를 시인의 언어가 섬세하게 풀어주기 때문에, 그림을 찬찬히 감상한 뒤 글을 읽거나 혹은 글을 먼저 읽고 그림을 보면 서로의 의미가 배가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 원로 화가의 예술혼에 화답했다는 점에서 문학과 미술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도 평가된다. 황학주 시인의 통찰은 그림이 담지한 정서를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여 독자에게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예술적 위로와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실제로 황학주의 글에서 비롯된 “죽을 것 같을 때 위로를 받으면 죽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은 변시지 화백 추모 행사에서 힐링과 위로의 메시지로 인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은 단순한 그림 해설을 넘어, 예술 간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으로서 문학적·예술적 의의를 지닌다.
- 시인의 인터뷰 및 비평적 해석: 황학주 시인은 그림 수집이 자신의 삶에 위안이 되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제주 정착 후 열린 한 전시회의 초대 글에서 그는 “그림 수집은 마음이 흔들렸던 순간의 기억”이라고 말하며, 어려운 시절마다 한 점씩 그림을 구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언급은 그가 왜 변시지의 그림들에 깊이 매료되었는지 짐작하게 하며, 본 산문집이 탄생한 배경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문단의 비평적 시각에서 볼 때, 황학주의 작품은 오래전부터 독특한 예술세계로 인정받아 왔다. 이광호 평론가는 그의 시에 대해“애매성의 매혹”이 있다고 평했고, 박덕규는 “서정적 서사시의 개척자”라 불렀으며, 이숭원은 “미학주의와 허무주의의 찬란한 융합”과 “독거의 아름다운 높이와 깊이”를 갖춘 시인이라 평했다. 이러한 비평들은 황학주 시인의 전반적인 문학세계를 향한 것이지만, 변시지의 그림을 다룬 이 산문집 역시 그의 서정성과 서사성, 미학적 탐구가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물로서 이러한 평가와 맥을 같이한다. 요컨대, 황학주 본인의 말과 평단의 해석 모두에서, 그의 작품이 지닌 위안과 미학적 깊이가 강조되고 있으며,『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은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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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언어
그림의 언어
예술은 때로 언어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변시지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러한 초월적 언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의 화폭에 펼쳐진 빛과 색, 그리고 선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보이지 않는 감정과 기억, 정신적 풍경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변시지의 예술적 여정은 동서양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적 도전이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의 서양화 수학으로 시작된 그의 여정은 한국의 전통미와 만나 독자적인 미학 언어로 승화되었습니다.
1975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선택한 제주도로의 귀향은 그의 예술 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섬의 풍경, 하늘을 가르는 까마귀의 날갯짓, 제주의 땅을 달리는 말들...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은 그의 붓끝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이야기로 되살아났습니다.
변시지의 그림 속 자연은 더 이상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희망과 고뇌, 그리고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상징적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간 내면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점입니다. 그는 자연에서 발견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재창조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감동과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추억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인생의 큰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 글은 독자 여러분을 변시지의 예술 세계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의 붓질 하나하나에 깃든 철학적 사유와 미학적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의 열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예술과 삶의 본질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화폭에 담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동으로 피어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