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그는 1926년, 태풍이 몰아치던 날 서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숨이 끊어진 줄 알았던 갓난아기는 긴 호흡 끝에 다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그의 삶에 바람이 멈추지 않았던 것은.
세상은 그를 '폭풍의 화가'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폭풍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티는 생명을 그렸습니다. 휘어진 소나무, 고개를 숙인 조랑말,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바람을 마주 선 사내. 그것은 제주의 풍경이자, 변시지 자신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여기, 100가지의 물음과 대답을 통해 우리는 화가 변시지가 아닌, 인간 변시지를 만납니다. 황토빛 캔버스 뒤에 숨겨두었던 그의 고뇌와 사랑, 그리고 소박한 꿈을 말입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화폭에 가두어 둔 바람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며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느냐고.
1926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태풍이 불던 날 태어났다는 일화가 있으며, 그의 호 '우성(宇城)'과 이름 '시지(時志)'는 때를 알고 뜻을 품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소년 시절 씨름을 하다 다쳐 한쪽 다리가 불편해졌습니다. 이 신체적 한계(절름발이 걸음)는 오히려 그가 내면의 세계와 그림에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가서 데라우치 만지로와 같은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카데믹한 기초와 더불어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서울에서 활동했고, 장년기에 다시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제주의 풍토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미적 근거입니다. 제주의 바람, 바다, 태양은 그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제주의 거친 바람, 구부러진 소나무, 조랑말, 까마귀, 그리고 초가집과 같은 제주의 향토적 소재들입니다.
제주의 거센 바람과 파도, 그리고 그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생명력을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 속 사물들은 바람에 의해 휘어지고 흔들리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기법을 익혔으나 결국 동양적 정신과 제주의 풍토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제주화'를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로서 그리기만 하던 그가 60세가 넘어 자신의 미적 체험과 예술론을 글로 정리한 것으로, 그의 예술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아름다움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어떠한 해설보다 감동이 우선하며, 아름다움은 인지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선택하고 화가의 미의식으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모방은 베끼기가 아니라 창조의 정신입니다.
예술 창작을 고무시키는 동기이자, 화가가 자신의 이념과 정서를 투영하여 재해석해야 할 대상입니다.
회화는 시각적 대상(보이는 것)을 다루지만, 종교화와 같은 예술은 감상자가 가진 지식과 믿음(믿는 것)을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신은 미술가에게는 보이기 위해, 신앙인에게는 믿기 위해 존재합니다.
기술은 실용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예술은 실용성을 떠나 독자적인 정신적 가치를 지닌 창조 활동입니다. 예술은 직관적 창조입니다.
선은 단순할수록 힘이 있습니다. 앵그르와 고갱의 영향을 받아, 선은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과 생명력을 요약하여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색채는 인생의 열광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는 인상파의 색채 이론을 연구했지만, 결국 제주의 풍토색인 '황토색(Yellow ocher)'과 검은 먹색을 통해 독자적인 색채관을 정립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단순화할 때 그 본질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세잔느처럼 자연을 구, 원추, 원통으로 보거나 대담하게 생략함으로써 예술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고전적 이념이 '재현(Representation)'에 있다면, 동양의 이념은 '표현(Expression)'에 있습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융합하고자 했습니다.
여백은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과 기운이 생동하는 공간입니다. 동양적 미학에서 여백은 채움보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예술은 그 시대와 풍토의 산물입니다. 화가는 자신이 발 딛고 선 땅(풍토)과 시대의 정신을 작품에 담아내야 합니다.
현대 미술이 지나치게 기교나 이론에 치우치거나,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가치와 감동을 중시했습니다.
과거에는 개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개성 또한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작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유한 개성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기교적으로 훌륭한 그림보다는 작가의 혼과 진실이 담겨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 명작입니다. "즐겁게 하는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고독은 예술가에게 숙명과도 같습니다. 그는 제주라는 고립된 섬에서 철저한 고독 속에 파묻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까마귀는 고독한 자아의 투영이자, 현실과 이상, 이승과 저승을 매개하는 영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휘어진 나무, 쏠린 풀, 구부러진 인물을 통해 시각화됩니다. 그의 붓질(필력) 자체가 바람의 움직임을 닮아 있습니다.
제주의 흙과 빛, 그리고 태양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는 이 고유한 색조를 통해 제주의 원초적인 생명력과 따뜻함을 표현했습니다.
서양화의 재료(유화)를 사용하면서도 동양화의 기법(선 위주의 묘사, 여백의 미)을 적용하여 동서양의 경계를 허문 독창적인 양식을 구축했습니다.
가장 지역적인 것(제주)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제주화'라는 장르를 개척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미소'보다 '손'에 주목했습니다. 미소가 신비로움을 준다면, 두 손을 포갠 모습은 다 빈치의 해부학적 지식과 관찰력이 응축된 결과물로, 인물의 우아함과 내면의 평온을 보여주는 결정적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은 구(球), 원추, 원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세잔느의 말처럼, 변시지 또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단순화된 형태 속에서 견고한 본질을 찾으려 했습니다.
시각적인 그림에서 '촉각적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는 힘입니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 여체나 꽃이 실제보다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예술은 시각을 넘어선 감각적 체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고갱의 선은 대상을 단순히 나누는 경계가 아니라, 작가의 강렬한 내면과 원시적 생명력을 표출하는 독자적인 언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변시지가 제주의 거친 풍토를 표현할 때 굵고 투박한 선을 사용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 낭만주의의 열정과 동양 도가 사상의 무위자연이 예술이라는 접점에서 만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기교를 넘어선 정신적 자유로움이 동서양 거장들의 공통된 지향점이라 생각했습니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처럼 형태를 해체하고 순수한 조형 요소를 추구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예술이 인간의 삶과 자연의 리얼리티에서 완전히 유리되는 것은 경계했습니다.
하나의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혁신적인 '형태 파괴'를 통해, 사물의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샀습니다.
단순히 그림이 잘 그려진 것을 넘어, 그림 속에 우주의 생명력과 작가의 호흡이 살아 숨 쉬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예술가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경지라고 여겼습니다.
기술은 예술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제비가 집을 짓는 것은 훌륭한 기술이지만 예술은 아니듯,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직관이 담길 때 비로소 기술은 예술로 승화됩니다.
화가는 아는 지식에 갇히지 않고 눈에 보이는 직관적 아름다움을 포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숨겨진 본질(아는 것)을 시각화하여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여야 합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존재하듯, 삶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의 그림에서 강렬한 태양(빛)은 역설적으로 짙은 검은색(그림자)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제주의 흙, 초가집, 그리고 태양에 그을린 제주 사람들의 피부색을 가장 잘 대변하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색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제주의 원초적인 온기를 느꼈습니다.
훌륭한 정물화 속 과일은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게 합니다. 이처럼 시각 예술인 회화도 공감각(Synesthesia)을 일으켜 미각, 촉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환기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재현은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기는 것이고, 표현은 작가의 감정과 사상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변시지는 재현에서 출발해 결국 자신만의 내면을 표출하는 '표현'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눈으로 선택하고 변형하여 현실보다 더 리얼한 감동을 주는 예술적 진실을 말합니다.
자연이라는 재료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과도 같은 힘입니다. 모방을 넘어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핵심 동력입니다.
바로 '선(Line)'입니다. 특히 제주의 바람처럼 휘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역동적인 선(장두필, 붓을 길게 잡고 그리는 기법 등)은 그의 화풍을 결정짓는 핵심입니다.
캔버스를 꽉 채우기보다 비워둠으로써 제주의 바람이 지나갈 길을 터주었습니다. 서양화 재료인 유화를 쓰면서도 붓을 얇게 펴 바르거나 캔버스 천의 질감을 살려 동양적 여백의 효과를 냈습니다.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에너지원입니다. 그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제주화)를 길어 올렸습니다.
화가가 붓을 놓는 순간이 아니라, 관람자가 그 그림을 보고 마음에 어떤 울림(감동)을 느낄 때 비로소 작품은 생명력을 얻고 완성됩니다.
1948년,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 단체인 '광풍회(光風會)' 공모전에서 23세의 나이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일본 화단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청년 변시지의 천재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첫 번째 기록입니다.
일본에서의 성공이 바탕이 되어 31세에 서울대 교수로 초빙되었지만,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당시 화단의 파벌 싸움과 권위적인 분위기에 깊은 환멸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6개월 만에 "나는 그림만 그리고 싶다"며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야인(野人)의 길을 택했습니다.
한국 생존 작가 최초로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그의 작품 <난무(The Dance)> 등이 10년간 상설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보편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는 미술사적 쾌거입니다.
크게 일본 시절의 '인물/풍경 사실주의', 서울 시절의 '비원파(후기 인상주의 경향)', 제주 귀향 초기의 '과도기',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완성된 '황색 시기(Yellow Period)'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변시지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황색 시기의 작품입니다.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꿈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를 이상향으로 이끄는 영혼의 동반자이자, 제주의 순수한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서양의 기법을 완벽히 익혀 인정받았지만(광풍회 최연소 수상 등), 내면 깊은 곳에서는 항상 자신의 뿌리인 '한국적 정서'와 '제주의 풍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안락한 지위와 명예보다는, 잃어버린 자신의 본질과 예술적 원형을 찾기 위해 고향의 품, 즉 바람 부는 제주 바다 앞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지도에 없는 섬 이어도는 그가 평생 붓을 통해 찾고자 했던 예술적 이상향(Utopia)이자,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이 하나가 되는 구원의 세계였습니다.
"예술은 그 시대와 풍토의 산물이다." 가장 나다운 것, 내가 발 딛고 선 땅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그려낼 때 비로소 세계와 통할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당시 많은 남성들이 아내를 가사 노동을 하는 존재나 소유물로 여길 때, 변시지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아내(주부)는 집안일을 처리하는 기계가 아니라, 감정과 꿈을 가진 존엄한 인격체임을 강조하며 가정 내에서의 평등과 존중을 역설했습니다.
서로를 구속하거나 지배하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각자의 세계를 존중해 주는 '독립된 동반자' 관계입니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 또한 하나의 온전한 우주를 가진 인격체이므로, 부모의 뜻을 강요하기보다 아이가 가진 고유의 기질(천성)을 발견하고 스스로 피어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 믿었습니다.
'속물(Snob)'입니다. 돈이나 지위, 권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예술조차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적인 태도를 가장 싫어했습니다.
돈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황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황금의 주인이 되라"고 하며, 가난하더라도 정신의 품위를 잃지 않는 삶(청빈)을 지향했습니다.
캔버스 앞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제왕처럼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그는 예술적 자부심과 인간적 겸손을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창작은 칭찬보다 비판 속에서 단단해진다고 믿었으며, 남의 말에 흔들리기보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외골수' 기질을 지켰습니다.
겉치레나 허례허식이 아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진정한 예의입니다. 그는 형식적인 예법보다 진실한 눈빛과 태도를 중시했습니다.
세속적인 출세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기답게 사는 삶입니다. 그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한 삶 자체를 성공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늙음은 추한 쇠락이 아니라, 잘 익은 과일처럼 향기가 짙어지는 과정입니다. 육체는 쇠해도 정신은 더욱 맑아져 예술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는 시기로 보았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무지개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평온함에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유, 제주 바다를 볼 수 있는 눈,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피부가 있음에 감사하는 소박한 마음이 곧 행복입니다.
슬픔은 영혼을 씻어주는 비와 같습니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으며, 깊은 예술 또한 나올 수 없습니다.
많은 친구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명의 지기(知己)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침묵의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지향했습니다.
해방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 정치적인 다툼, 복잡한 인맥 관계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와 '자연'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간다는 설렘이었습니다.
그의 옷차림, 식사, 말투는 모두 꾸밈없고 단순했습니다. 복잡한 것을 걷어내야 본질이 보인다는 예술 철학이 생활 습관에도 그대로 배어있었습니다.
제주의 아름다움은 원시적인 야성에 있는데, 무분별한 개발로 그 풍토가 파괴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입니다.
말은 때로 진실을 왜곡하지만, 침묵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주의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기 위해 자주 침묵했습니다.
특정한 종교 의식보다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매 순간 진실하게 사는 것이 곧 기도이자 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그림 자체가 구도(求道)의 과정이었습니다.
무의미한 사교나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예술을 위해 주어진 유한하고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지 않고, 서로 다른 개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세상. 마치 그의 그림 속에서 거친 바람과 작은 새가 한 화면에 공존하듯, 평화롭고 순수한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손재주를 믿지 말고 눈과 마음을 믿어라. 기교는 연습하면 늘지만, 보는 눈은 깊은 사색 없이는 얻을 수 없다."
"멈추지 마라. 태풍이 불어도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고통스러울 때가 바로 껍질을 깨고 나갈 때다."
"유행은 바람처럼 지나간다. 남들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너만이 갈 수 있는 좁은 길, 너의 풍토를 찾아라."
"개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네 안에 있는 가장 솔직한 모습,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그 모습 속에 진짜 네가 있다."
"가난은 불편하지만 불행은 아니다. 헝그리 정신이 없으면 예술의 야성은 죽는다. 풍요 속에서는 영혼이 살찌기 힘들다."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은 좋다. 그러나 결국 돌아와야 할 곳은 너의 뿌리다. 남의 것을 배우되 너를 잃어버리지는 말라."
"멀리서 찾지 마라. 네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지나가는 바람, 이웃의 주름진 얼굴 속에 우주가 있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따뜻한 가슴 없이는 차가운 캔버스를 데울 수 없다."
"나를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자극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자극제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예술이 밥을 주지는 않지만, 사람이 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 세상은 변한다."
'우주 우(宇)'에 '재 성(城)'. 우주를 담는 성, 혹은 집이라는 뜻으로 그의 예술 세계가 제주의 작은 섬을 넘어 무한한 우주로 확장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변시지의 제주화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후대들이 그 정신을 이어받아 각자의 시선으로 제주의 풍토를 재해석할 때 제주화는 계속 진화할 것입니다.
화려한 교향곡보다는 첼로 독주곡이나, 제주의 노동요, 혹은 바람 소리 그 자체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 그리고 인간 본연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Nostalgia)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자,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그리기는 숨 쉬기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역설적인 위안을 줍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구나, 저 바람 속의 사내도 외롭구나."
여전히 제주의 바다와 오름을 그렸겠지만, 기후 변화로 변해가는 제주의 모습에 아파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을지도 모릅니다.
'바람(Wind)'입니다. 물리적인 바람이자, 시대의 바람, 그리고 내면의 일렁임입니다.
찰나의 순간입니다. 그의 예술은 100년을 넘어 영원성을 획득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평생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치열하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화폭에 남김없이 쏟아부었으므로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예술가였습니다.
역류(逆流)의 미학:
변시지의 ‘비원 시대’와 한국적 풍토미의 재건
1. 서론: 경계에 선 화가의 자각
우성(宇城) 변시지의 예술 세계를 논함에 있어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비원(秘苑) 시대’는 단순한 과도기가 아닌, 작가의 예술적 정체성이 확립된 결정적 시기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청년 시절 일본 광풍회(光風會)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그였지만, 귀국 후 그가 마주한 것은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그는 자신의 캔버스에 담긴 기법이 서양의 것일지언정, 그 안에 담겨야 할 혼(魂)은 철저히 한국적이어야 함을 자각했다. 작품 <애련정(愛蓮亭)>은 이러한 자각이 치열한 조형적 실험을 거쳐 하나의 완결된 미학으로 승화된 결과물이다.
2. 시대정신: 타자를 쫓는 시선에 맞서 내면을 응시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한국 화단은 격변기였다. 전후(戰後)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작가가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앵포르멜(Informel)과 서구 추상표현주의 등 해외의 사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었다. 모두가 눈을 바깥으로 돌리며 서구의 조형 언어를 이식하기에 급급했던, 소위 ‘탈(脫)한국’이 모던함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변시지는 이러한 거대한 시류에 역행(逆行)했다. 그는 위와 같은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모두가 밖을 볼 때 그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근대화와 서구화의 물결 속에 급격히 소실되어 가던 ‘잃어버린 한국적 풍토미(風土美)’를 재건(Reconstruction)하는 것을 자신의 예술적 소명으로 삼았다.
그가 매일같이 창덕궁 후원(비원)을 찾은 것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한국 고유의 색감, 선, 그리고 공기의 질감을 화폭에 붙잡아 두려는 처절한 기록이자 저항이었다.
3. 조형 분석: 한국적 빛의 온도를 찾아서
작품 <애련정>은 이러한 작가의 철학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정점이다.
- ■ 빛의 번안(Translation) 변시지는 서양의 인상주의가 추구했던 ‘태양의 빛’을 한국의 ‘스며드는 빛’으로 치환했다. 화면 속 애련정을 감싸는 빛은 강렬하게 내리꽂히지 않고, 숲의 녹음과 오래된 기와 사이로 은은하게 배어 나온다. 이는 한국의 풍토가 가진 습도와 온도를 정확히 이해한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색채다.
- ■ 정중동(靜中動)의 구현 화가는 캔버스의 절반을 할애하여 수면에 비친 반영(Reflection)을 그렸다. 실재하는 정자가 견고한 역사를 상징한다면, 물에 비친 허상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작가의 내면이자 한국의 정서다. 그는 이 두 세계를 대등하게 배치함으로써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는 한국 전통 미학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4. 의의: 고독한 선구자의 길
당시 화단의 유행을 따랐다면 그는 더 쉽고 빠른 명성을 얻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변시지는 고립을 자처하며 비원의 숲속으로, 그리고 훗날 제주의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애련정>은 화려한 서구의 옷을 입기를 거부하고, 가장 한국적인 흙냄새와 고요를 찾으려 했던 한 화가의 고독한 투쟁의 산물이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서양 재료인 유화 물감으로도 한국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는 훗날 한국 미술이 나아가야 할 ‘주체적 현대화’의 방향을 미리 제시한 선구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5. 결론
변시지에게 ‘비원’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잃어버린 한국의 미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성소(聖所)였다. 남들이 바다 건너의 화려한 사조를 동경할 때, 묵묵히 우리 땅에 발을 딛고 한국적 미의 원형을 탐구했던 그의 집념은 <애련정>이라는 명작으로 남았다.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세계화란 밖을 쫓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시지의 예술적 순례와 '제주화(濟州畵)'의 조형적 완결
시기별 화풍의 심층 비교 및 미학적 분석
1. 서론: 풍토(風土)와 실존(實存)의 교차점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변시지(Byun Shi-ji, 1926~2013)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의 화풍이나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 이상의 무게감을 지닌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 치하의 일본에서의 화려한 등단과 서양화 기법의 완벽한 체득, 1957년 서울대학교 초빙으로 영귀 귀국 후 서울에서의 정체성 탐구와 사실주의적 기록, 그리고 마침내 고향 제주로의 귀환을 통해 동서양의 미학을 융합한 독자적인 조형 언어인 '제주화(Jeju-hwa)'를 완성해낸 거장이다.
이 글은 변시지 예술의 핵심 기제인 '장소성(Site-specificity)'과 '풍토론(Theory of Climate)'을 축으로 삼아, 그의 예술을 일본 시기(1931~1957), 서울 시기(1957~1975), 제주 시기(1975~2013)로 구분하여 심층 분석한다. 특히 '제주화'의 탄생 배경과 조형적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 앞선 두 시기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 변시지가 어떻게 서양의 빛과 원근법을 해체하고, 제주의 황토색(Hwangto)과 검은 선(Black Line)으로 이루어진 실존적 공간을 구축했는지 추적한다.
“제주는 그에게 태양과 바람, 고독이 뒤엉킨 원초적 풍토였으며, 캔버스 위의 폭풍은 개인의 내면과 시대의 비극을 동시에 드러낸다.”
2. 제1장: 일본 시기 (1931~1957) — 서양적 빛의 체득과 아카데미즘의 정점
2.1 신체적 결핍과 예술적 몰입
192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난 변시지는 193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으며, 어린 시절의 씨름사고로 인해 평생 지팡이를 짚게 되는 신체적 결핍을 갖게 되었다. 이 결핍은 활동적 삶에서 그를 배제했지만, 동시에 내면으로의 침잠을 촉발하여 회화에 대한 몰입을 심화시켰다. 이후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팡이를 짚은 사내' 도상은 이 시기의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2 데라우치 만지로와 임파스토 수련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에서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에 들어가 서양 근대의 유화 기법, 특히 임파스토(Impasto)와 명암법을 숙달했다. 이 시기 그의 화면은 물감의 물리적 두께와 붓질의 힘으로 구축되며, 빛을 외부 광원으로 재현하는 서구적 자연주의 전통에 충실했다.
2.3 최고 공모전 수상과 아카데미적 완성
1948년 광풍회전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화단에서 빠르게 주목받았다. 그의 최연소 기록은 현재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변시지는 훗날 이 시기의 작품을 "남의 옷을 입은 듯" 느꼈다고 회고하며, 기술적 완성 뒤에 남은 정체성의 공백을 자각하게 된다.
3. 제2장: 서울 시기 (1957~1975) — 비원파(秘苑派)의 사실주의와 정체성의 모색
3.1 비원으로의 침잠
귀국 후 변시지는 창덕궁 비원을 중심 소재로 삼아 '비원파'로 불리며 한국적 전통미를 탐구했다. 이 시기에는 세필과 박막의 섬세한 묘사, 사진적 정교함을 통해 고궁의 정취를 재현하려 했다.
3.2 상업적 성공과 내면의 공허
이 시기에도 그의 창작활동의 주 무대는 일본이었고, 한국 비원 시리즈는 일본에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변시지는 스스로의 표현이 여전히 객관적 재현에 머물러 있음을 느꼈다. 이는 그가 진정한 독창성을 찾기 위해 고향 제주로 귀향하는 계기가 된다.
4. 제3장: 제주 시기 (1975~2013) — 황토빛의 혁명과 '제주화'의 완성
4.1 황토색의 발견
1975년 제주 귀환은 일본과의 단절을 가져오면서 변시지의 예술적 전환점이 되었다.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경험한 '황토빛'의 시각적 충격은 곧 그의 화면을 지배하는 기조색이 되었고, 이는 단순한 색채 선택을 넘어 존재론적·미학적 선언이 되었다.
4.2 '해체와 재구축'의 단계
제주 시기는 초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서울 시기의 잔재가 남아 있었으나 점차 황토색의 전면화, 굵은 검은 선의 도입, 그리고 도상들의 상징화가 진행되며 중기에 '제주화'가 정립되었다. 후기에는 형상이 더 단순화되고 명상적 여백이 강조되며 '졸박미'가 극대화되었다.
4.3 조형 요소 분석
색채
황토색은 대상들 사이의 위계를 제거하고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놓는 기조색으로 기능한다. 일본 시기의 물리적 빛과 달리, 제주 시기의 빛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정신적 빛이다.
선
거칠고 역동적인 검은 선은 유화 붓으로 구현한 서예적 필력으로, 바람의 움직임을 시각화한다. 갈필과 같은 효과를 통해 제주의 거친 풍토를 표현한다.
공간
서양적 원근법은 해체되고 여백과 평면성이 자리잡는다. 관람자는 풍경 밖에서 바라보는 '타자'가 아니라 바람의 한가운데로 초대되어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흐려진다.
4.4 도상학적 분석
| 도상 | 상징적 의미 |
|---|---|
| 구부정한 사내 | 작가의 분신이자 신체적 결핍과 인내의 상징 |
| 조랑말 | 섬에 갇힌 운명과 연민의 대상 |
| 까마귀 | 고독의 매개체이자 삶과 죽음 사이의 메신저 |
| 소나무 | 바람을 견디며 꺾이지 않는 생명력 |
| 태양·바다 | 삶의 터전이자 단절과 동경의 상징 |
5. 제4장: 3시기의 심층 비교 분석 및 통시적 고찰
변시지의 변모는 기술·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관의 전회이다. 다음 표는 핵심 지표를 통해 세 시기를 비교한다.
| 구분 | 일본 시기 (1931~1957) | 서울 시기 (1957~1975) | 제주 시기 (1975~2013) |
|---|---|---|---|
| 핵심 철학 | 서구 모더니즘, 자연주의 | 민족적 정체성, 사실주의 | 풍토론(Pungto), 실존주의, 노장사상 |
| 주요 기법 | 임파스토(두터운 물감) | 세필(정교한 묘사) | 갈필·검은 선(유화로 그린 수묵) |
| 주조 색채 | 자연색·다색 | 청록·푸른색조 | 황토색(Yellow Ocher) |
| 공간 구성 | 투시 원근법 | 연극적·무대적 | 평면성·여백 |
| 자아의 위치 | 학습자·관찰자 | 이방인·기록자 | 주체·실존적 자아 |
5.1 재현에서 표현으로
일본과 서울 시기는 주로 재현의 범주에 머물렀고, 제주 시기는 표현의 세계로 이행했다. 변시지는 제주의 풍토를 통해 개인적·정치적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시대의 알레고리를 제작했다.
5.2 재료의 토착화
유화라는 서양 재료를 통해 닥종이나 장판지 같은 한국적 질감을 만들어낸 점은 그의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가장 창의적 응답이었다.
5.3 시선의 전회
그는 이방인의 시선에서 고장의 주체로 거듭나며 예술적 주체성을 회복했다. 이는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예술적 귀환이었다.
6. 제5장: 심층 통찰 및 예술사적 의의
6.1 지역성의 보편성
그의 작품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미학적 명제를 증명한다. 지역성에 천착함으로써 보편적 호소력을 얻었다.
6.2 시대의 우울과 저항
폭풍과 휘청이는 소나무, 꺾이지 않는 사내의 형상은 1970~80년대 한국의 정치적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6.3 동양적 실존주의의 완성
변시지의 회화는 서구 실존주의와 동양 노장사상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으며, 인간의 고독과 운명에 대한 숙고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7. 결론: 바람의 길, 영원한 귀향
변시지는 201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귀포의 작업실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예술 여정은 일본의 찬란한 태양, 서울의 차분한 그늘을 거쳐 제주의 거친 바람 속에서 황금빛으로 산화했다. 제주화는 서양 기법의 습득, 형식적 고민의 성찰, 그리고 풍토에의 철저한 천착이 결합해 탄생한 총체적 성취이다.
“고통 속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벼랑 끝 까지 스스로를 몰아 내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예술가는 그런 사람인지 모릅니다."
— 변시지의 황토빛 화폭이 남긴 무언의 메시지 이다.
풍토 속의 실존: 변시지,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사르트르의 미학적 교차점
서론 · 세 겹의 풍토, 세 개의 목소리
“인간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지리적 좌표를 묻는 것을 넘어, 던져진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탐구한다. 20세기 중반, 이 질문에 세 인물이 각기 답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선언했고,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전후(戰後) 유럽의 트라우마를 캔버스 위의 비명과 뒤틀린 육체로 형상화했다. 한국의 화가 변시지는 제주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 일본의 제국주의, 청년기 서울의 분단과 전쟁, 말년 제주에서의 4·3의 상흔이라는 삼중의 역사적 풍토를 겪으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예술로 탐구했다.
변시지는 일본 오사카 유학 시절 서양화의 아카데미즘 기법을 익혀 1948년 ‘광풍회’ 공모전에서 역대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1975년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와 이후 45년간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이처럼 변시지의 삶은 식민의 제국, 분단의 서울, 학살의 제주라는 삼중의 폭력적 풍토 속을 지나간 여정이었다. 이 세 인물을 하나로 엮는 철학적 키워드는 “풍토(風土)”이다. 일본 철학자 와츠지 데쓰로는 풍토를 단순한 자연환경을 넘어 인간 존재를 둘러싼 총체적 조건으로 보았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상황 속의 자유”임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뒤틀린 인체는 전후 유럽이라는 풍토가 남긴 트라우마의 흔적이며, 변시지의 그림은 제국주의, 전쟁, 학살이라는 세 겹의 풍토를 통과한 그의 실존적 응답이다. 본 글은 변시지 예술을 중심에 두고, 그의 예술세계와 연관된 풍토 개념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다:
- 실존의 조건으로서 풍토는 어떻게 예술적 형식을 규정하는가?
- 전후의 폐허와 폭력이라는 공통된 상황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예술가는 어떻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르게 탐구했는가?
- 변시지는 일본의 아카데미즘, 서울의 전통, 제주 자연이라는 삼중 풍토를 거치며 어떻게 동·서양 기법을 통합하고, 제주의 특수한 소재를 보편적 인간성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는가?
이 글은 위 질문들에 대해 변시지를 축으로 사르트르와 베이컨의 작업을 풍토론과 함께 비교·사유하는 예술철학적 여정이다.
1부: 풍토와 실존의 변증법
1.1 와츠지의 풍토론과 사르트르의 상황 개념
와츠지 데쓰로는 『풍토(風土)』(1935)에서 기후와 지리, 역사로 이루어진 환경이 인간의 사유와 감성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그는 몬순(습윤적 기후)과 사막(극한의 열기)과 목초지(온화한 초원) 등 각기 다른 풍토가 서로 다른 인간성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풍토는 단순한 물리적 배경을 넘어서 사람과 문화의 형태를 길러내는 근원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사르트르의 경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절대적 자유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그는 그 자유가 비연속적 상황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자유를 “‘상황 속의 자유’”로 정의하며, 자유는 다양한 조건에 의해 제약됨을 강조했다. 요컨대, 와츠지의 풍토와 사르트르의 상황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특정한 풍토와 역사를 가진 환경에 태어나며, 그 조건이 우리 행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형성한다. 와츠지가 풍토의 규정성을 강조했다면, 사르트르는 바로 그 풍토 안에서 주체가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갈 가능성(기투project)을 모색한다고 할 수 있다.
1.2 전후 풍토: 폐허 위의 실존
20세기 중반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이념 대립으로 인류 문명이 붕괴된 시기였다. 전통적 가치와 합리성은 무너졌고, 이른바 ‘의미의 공백’ 상황이 조성되었다. 사르트르는 이를 초월적 질서가 사라진 상태, 즉 “신의 죽음” 이후의 상황으로 해석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고, 그 자유는 동시에 깊은 불안과 마주함을 뜻한다. 베이컨은 바로 이 불안을 캔버스에 담았다. 일례로 DailyArt 기사에 따르면, 베이컨은 “어둡고 왜곡된 형상들이 가득한 섬뜩한 세계”를 창조했는데, 이는 그의 트라우마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의 인물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신체는 해체된 듯 왜곡된다. 이 형상들은 단순한 그로테스크가 아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의 시선 앞에 선 인간은 대상화되고 자유가 제한된다. 베이컨은 투명한 상자나 틀 안에 인간을 가두어 마치 감옥이나 도살장의 풍경을 연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타자의 시선이 개인을 짓누르는 폭력을 시각화했다. 전통적 재현을 거부한 그는 “자신의 신경계를 캔버스에 옮기고 싶다”고 말한 바 있으며, 캔버스 위에 폭력의 흔적을 직접 그려 넣음으로써 관람자가 그 고통을 직시하도록 하는 ‘증언의 미학’을 택했다.
1.3 변시지의 삼중 풍토: 폭력의 지층학
프랜시스 베이컨이 단일한 전후 유럽의 트라우마에 반응했다면, 변시지가 겪은 풍토는 세 겹의 폭력이 층층이 쌓인 지층과도 같았다.
제국의 풍토 (일본)
변시지는 6세에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데라우치 만지로에게 사사받으며 서양 근대 미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1948년 22세의 나이에 일본 최고 권위의 공모전인 ‘광풍회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러나 그 성공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당시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일본인의 기질과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린다고 평할 만큼, 화려한 기술 너머에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드러났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결국 그를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1957년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미술계에서 인정받았지만 정체성의 불일치와 강렬한 폭력의 시대상을 동시에 체감한 시기였다.
분단의 풍토 (서울)
해방 후 귀국한 변시지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일본 유학파라는 이유로 동료들의 질시를 받으며 1년 만에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는 창덕궁 후원(비원) 주변을 무대로 비원파(秘苑派)로 활동하며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장르를 바꿔 한국적 아름다움을 탐색했다. 예를 들어 「가을 부용정」은 기왓장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여전히 일본에서 익힌 서양 화풍의 잔재를 담고 있었다. 어두운 전쟁 폐허와 이념 대립의 시대에 그는 평온한 전통 공간을 그리면서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너머 사회의 깊은 분열과 좌절을 체감해야 했다.
학살의 풍토 (제주)
1975년, 변시지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둔 채 ‘쫓겨나듯’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그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국가 권력의 폭력적 학살의 기억과 마주했다. 친지들과 이웃의 희생 소식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제주일보 해설에 따르면, 변시지는 제주의 황토빛 화면에 “4·3으로 핏줄을 잃은 자의 슬픔과 제주인들의 근원적인 비애”를 담아냈다. 곧이어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배경을 넘어, 진실이 은폐되고 죽음마저 침묵된 ‘강제된 침묵의 풍토’로 그의 그림 속에 체화되었다.
이렇게 제국주의, 분단, 학살이라는 삼중의 폭력적 풍토를 통과한 변시지의 예술은, 그 다층적 트라우마를 증언하고 치유하려는 실존적 응답이었다.
2부: 두 개의 형식, 두 개의 응답
극한의 풍토 속에서 베이컨과 변시지는 각기 다른 형식 전략으로 실존의 의미를 탐색했다.
2.1 프랜시스 베이컨: 폭력이 새긴 육체의 비명
베이컨의 캔버스는 관람자에게 불안을 안긴다. 그의 인물들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살갗은 늘어지고 해체된 듯 뒤틀린다. DailyArt가 지적했듯, 베이컨의 트라우마는 “어둡고 왜곡된 형상들로 가득한 섬뜩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투명한 상자나 철창에 갇혀 있는데, 이는 마치 감옥이자 도살장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감금된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 아래 완전히 대상화된 상태를 드러낸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자의 시선에 포박된 주체는 스스로의 자유가 제한된 채 객체로 나타난다. 베이컨은 전통적 재현을 배제하고 “신경계 전체를 캔버스에 옮기려”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겪은 폭력과 불안을 육체에 아로새기고, 이를 통해 관람자가 직접 고통을 체감하도록 하는 폭로와 증언의 미학을 택했다. 그의 그림에서 비명 짖는 머리와 찢겨진 신체는, 전후 유럽이라는 풍토가 새긴 잔혹한 흔적을 상징한다.
2.2 변시지: 삼중 풍토를 통과한 예술적 변모
변시지는 베이컨과는 반대로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본·서울·제주를 거치며 전수받은 요소들을 융합하고, 폭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원형을 모색했다.
일본 (습득)
변시지는 일본 유학 시절 서양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철저히 습득했다. 특히 데라우치 만지로 문하에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기법을 연마했고, 1948년 광풍회전에서 네 점의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엄격한 훈련은 훗날 형식 해체와 재구성의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서울 (재발견)
귀국 후 서울에서는 창덕궁 후원 풍경을 그리며 한국적 전통과 동양적 감수성을 재발견했다. 그는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옮겨가며 빼곡한 기와지붕과 전통 건축에 한국의 미학을 담았다. 서양 기법(일본 유학)과 동양 정신(서울의 역사적 공간)이 충돌하고 충돌하면서, 새로운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 (통합과 승화)
1975년 제주에 정착하면서 예술적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다. 그는 제주의 폭풍과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랑말, 까마귀, 초가집, 돌담과 같은 구체적 소재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제주 돌담은 ‘파도와 비, 햇빛과 짠내를 똑같이 견디며’ 쌓인 돌들의 연속으로, 그 위 까마귀들은 같은 바람을 맞으며 ‘이름 없는 평등’을 이룬다고 그는 기록했다. 초가집과 소나무는 풍토를 견디는 고독한 거처이자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풍부한 지역적 상징을 통해 변시지는 제주도의 거친 풍토와 사람들의 운명을 서사화했다.
변시지 예술의 형식적 완성은 제주의 독특한 상징들과 함께 “황색 바탕과 먹선”으로 구현되었다. 황색은 서양화의 전통적 캔버스 바탕이자 한국 전통의 황토색(대지의 색)이며, 모든 이념적 대립을 초월한 생명의 공간을 의미한다. 먹선은 동양 수묵화·서예의 핵심 기법이지만, 변시지는 이를 서양적 공간 구성과 결합했다. 그의 선은 단순한 윤곽이 아니라 대상의 기(氣)와 리듬을 담는 생동적 움직임이다. 실제로 변시지는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세계가 온통 아열대 태양 아래 노랗게 보였다”고 회고하며, 황토색을 고유색으로 삼았다. 그는 “천지현황(天地玄璜): 玄은 하늘의 색, 黃은 땅의 색”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색채 선택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를 시각화하려는 시도였다. 평론가들이 ‘평등원’이라 부른 그의 세계는, 베이컨의 격렬한 색채 충돌과 달리 황색과 흑색이 어우러져 일종의 일체감을 만든다. 이 형식적 조합은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치유와 재생을 향한 변시지의 실존적 선택이었다.
2.3 형식의 완성: 황색과 먹선, 동서양의 통합
변시지는 동·서양 기법의 변증법적 통합을 통해 자신만의 형식 언어를 구축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황토색을 “무한한 공간과 이야기, 꿈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보고, 제주 바다와 땅의 원초적 힘과 인간 의지를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 한편 검은 먹선은 동양인의 정신과 혼을 담아내는 가장 ‘동양적이고 편안한 색’으로 여겼다. 그는 형식적으로 서양화의 색채성에서 벗어나, 수묵화의 간결함과 동양적 미학을 결합했다. 실제로 변시지는 종착점에서 “천지현황(天地玄璜) – 검은 현(玄)은 하늘의 색, 누를 황(璜)은 땅의 색”이라는 색채론을 확립했다. 이러한 형식은 모든 사물을 하나의 색으로 통합하는 ‘무차별의 세계’, 즉 평등원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베이컨이 색채의 충돌로 불안과 긴장을 조성했다면, 변시지는 황색과 흑의 조화로 일체감을 만들며 포용과 치유의 미학을 선택했다.
3부: 자유의 한계와 가능성
3.1 극복의지: 상황을 초월하는 기투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란 제약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진 제약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식이 단순히 현재의 사실성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향해 ‘기투(project)’해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전후 유럽의 트라우마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왜곡된 육체 형상으로 능동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응답했다. 변시지에게도 삶 자체가 ‘극복 의지’였다. 그는 제국주의와 분단이라는 극한의 제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식민지 억압 아래 서양 화풍을 연마했고, 전쟁 폐허 속에서도 조용한 아름다움을 그렸으며, 4·3의 침묵 속에서 생명의 원형을 그려냈다. 제주의 강풍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소나무처럼, 그는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유연한 극복 의지를 보여주었다.
3.2 고독과 연대: 베이컨의 고립과 변시지의 연결
사르트르의 초기 사상은 ‘타인은 곧 지옥’이라는 경구로 대변되듯 개인의 고독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예술 역시 이 고독한 개인을 그린다. 그의 인물들은 항상 혼자이며, 각자의 고통 속에 갇혀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연출한다. 변시지의 그림에도 고독은 등장하지만, 그 결은 베이컨과 다르다. 황량한 제주 들판에 외롭게 선 조랑말과 초가집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드러내지만, 이들은 대지에 발붙이고 바람을 맞으며 풍토의 일부로 이어져 있다. 가령 변시지는 돌담이 ‘수없이 쌓인 돌들’로 이루어져 서로 이어지듯, 개인의 영역을 나타내는 돌담이 연결돼 마을 공동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즉 그의 고독은 멀리 외면당한 고립이 아니라, 대지와 바람과 더불어 존재하는 ‘연결된 고독’이다. 변시지는 개인의 고독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 회복을 지향한다. 이는 사르트르 후기의 사유처럼, 개인과 집단의 긴장적 관계를 함께 시각화하는 것이다.
3.3 지역성에서 보편으로: 특수성의 승화
변시지 예술의 위대한 성취는 『지역성의 보편화』이다. 제주도 조랑말이나 돌담 같은 소재는 가장 특수한 지역적 이미지다. 그러나 변시지는 이 특수성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다다랐다. 사르트르도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변시지의 그림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척박한 바람을 견디는 제주 조랑말은 ‘모든 생명이 맞서는 시련에서의 인내’를, 거센 제주 폭풍은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고난’을 상징한다. 앞서 인용했듯 그의 황토빛에는 4·3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과 제주인의 운명이 녹아 있다. 변시지는 제주의 특수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심화함으로써, 오히려 모두에게 공명하는 예술 언어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서양 기법을 아우르는 형식 언어, 즉 황색 바탕과 먹선을 통해 지역적 이야기를 세계적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결론: 풍토 위에 선 자유
이 글은 변시지, 베이컨, 사르트르라는 세 인물이 ‘풍토’와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교차적으로 다루었는지 살폈다. 삼중의 폭력이 남긴 전후의 폐허라는 공통 풍토 앞에서 사르트르는 사유로 응답했고, 베이컨과 변시지는 각기 다른 형식으로 응답했다. 풍토는 우리를 규정하지만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 베이컨은 유럽의 트라우마를 육체의 비명으로 증언했다. 변시지는 제국주의·전쟁·학살이라는 ‘삼중의 풍토’를 지나며, 고통을 재현하기보다 극복 의지와 생명의 재생을 선택했다. 그의 예술은 자유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보여준다. 첫째, 황색과 먹선이라는 통합된 색채 체계를 통해 동·서 이분법을 넘는 제3의 길을 열었다. 둘째, 철저한 지역성 파고들기를 통해 특수한 경험이 보편적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기후 위기와 디지털 소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풍토와 마주한다. 이런 압도적 상황 앞에서 변시지의 예술은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진다. 베이컨의 그림처럼 절망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변시지의 조랑말처럼 뿌리 깊은 땅 위에 서서 폭풍을 견디며 극복할 것인가.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답하자면, 인간은 풍토 위에, 역사 속에, 육체 안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조건들을 넘어서는 움직임, 즉 자유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변시지의 예술은 풍토에 뿌리박은 채 이를 초월하려는 이 위대한 실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시대의 폭풍을 삼킨 화가: 변시지의 예술과 실존
"시대상황이 한 화가를 완성했다"는 통찰은 변시지 화백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그의 삶은 식민지(정체성의 상실), 2차 세계대전(파괴), 6.25 전쟁과 냉전(이념 대립과 분단), 그리고 4.3사건(내재된 상처)이라는 20세기 한민족의 고난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가 내렸던 예술적 결정들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닌, 생존과 실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1. 시대의 혼돈과 '구상(具象)'의 필연성
변시지 화백이 활동하던 1950~70년대 한국 화단은 서구의 추상미술, 특히 '앵포르멜(Informel, 비정형 추상)'이 휩쓸고 있었습니다.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젊은 작가들에게, 기존의 형상을 파괴하고 격렬한 물성과 행위로 내면의 상처를 토해내는 추상 작업은 시대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변시지는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구상'을 고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대적 역행이 아니라,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필연적 선택이었습니다.
이유: '추상'을 넘어선 '현실'의 압도성
앵포르멜이 '파괴'와 '혼돈'을 표현하려 했다면, 변시지에게는 그가 겪은 현실 자체가 이미 파괴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식민지 소년으로 겪은 2차 대전의 공포, 귀국 후 마주한 6.25의 폐허와 이념 대립은 이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 부조리'의 극치였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혼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돈의 폐허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존재'하는 무언가를 붙잡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 '말', '나무' 같은 구체적인 '형상(구상)'이었습니다.
결론: 구상은 '휴머니즘'의 마지막 보루
모든 것이 파괴되고 이념으로 인간이 대체되는 시대에, 그가 고집한 '구상'은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이자,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존재를 긍정하려는 실존적 태도였습니다. 그의 구상은 단순한 재현이 아닌, 시대의 폭력에 맞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도구였습니다.
2. 정체성의 탐색과 '비원(祕苑)'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가 마주한 서울은 6.25 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식민지인'으로 자란 그에게 '조국'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착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유: 상실된 '원형(原型)'에 대한 갈망
그의 청년기는 '일본(타자)' 속에서 '조선인(자아)'이라는 정체성의 혼란기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이념 대립 속에서 '조국'의 순수한 원형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비원(창덕궁 후원)'은 그에게 식민과 전쟁으로도 훼손되지 않은 '조선(한국)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비원의 고궁과 정자는 서구화나 식민지화 이전의,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이자, 그가 찾고자 했던 정체성의 뿌리였습니다.
결론: '비원'은 정신적 귀향지
폐허(전쟁)와 혼란(냉전)의 한복판에서, '비원'은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귀향지였습니다. 그는 비원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며 식민지 청년으로서 상실했던 자신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스스로 재구축하려 했습니다.
3. '풍토(風土)'로서의 제주: 실존의 무대
1975년,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주로 향합니다. 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닌, 그의 삶을 완성하는 운명적 귀결이었습니다.
이유: 내면의 폭풍과 '풍토'의 공명(共鳴)
그가 제주에서 마주친 '풍토'는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친 바람, 검은 현무암, 고립된 섬이라는 원시적이고 가혹한 환경이었습니다.
이 제주의 '풍토'는 그가 평생 겪어온 시대적 시련(식민, 전쟁, 이념)의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었습니다.
- 거친 바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아쳤던 20세기 역사의 폭력(전쟁, 식민 통치) 그 자체였습니다.
- 검은 현무암: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상처(4.3의 비극, 6.25의 폐허)의 응축물이었습니다.
- 고립된 섬: 일본에서도, 서울에서도 이방인이었던 그가 느낀 '고독'의 궁극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결론: '풍토'는 운명이자 실존의 무대
제주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 풍경(시대적 트라우마)과 정확히 일치하는 외부 세계(제주의 풍토)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 가혹한 풍토에 맞서거나 도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견뎌내는 인간과 말을 그립니다.
제주의 풍토는 그에게 '운명' 그 자체였으며, 그 운명 속에서 고독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실존의 무대'였습니다.
종합 결론
변시지의 예술 여정은 '정체성의 탐색(비원)'에서 시작하여 '실존의 증명(제주)'으로 완성됩니다.
-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혼돈 속에서 그는 추상이 아닌 '구상(인간)'이라는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습니다.
- 폐허가 된 서울에서 그는 '비원(전통)'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뿌리, 즉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 그리고 마침내 '제주(풍토)'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겪어온 시대의 폭력과 고독이라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냈습니다.
결국 그가 제주에서 그린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식민, 전쟁, 분단이라는 20세기의 폭풍우를 온몸으로 삼키고도 꿋꿋이 서 있는 한 인간의 실존,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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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언어
그림의 언어
예술은 때로 언어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변시지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러한 초월적 언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의 화폭에 펼쳐진 빛과 색, 그리고 선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보이지 않는 감정과 기억, 정신적 풍경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변시지의 예술적 여정은 동서양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적 도전이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의 서양화 수학으로 시작된 그의 여정은 한국의 전통미와 만나 독자적인 미학 언어로 승화되었습니다.
1975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선택한 제주도로의 귀향은 그의 예술 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섬의 풍경, 하늘을 가르는 까마귀의 날갯짓, 제주의 땅을 달리는 말들...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은 그의 붓끝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이야기로 되살아났습니다.
변시지의 그림 속 자연은 더 이상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희망과 고뇌, 그리고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상징적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간 내면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점입니다. 그는 자연에서 발견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재창조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감동과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추억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인생의 큰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 글은 독자 여러분을 변시지의 예술 세계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의 붓질 하나하나에 깃든 철학적 사유와 미학적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의 열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예술과 삶의 본질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화폭에 담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동으로 피어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