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와 광풍회(光風會)

♦ 광풍회(光風會)의 창립과 이념

광풍회는 1912년(메이지 45년)에 결성된 일본의 서양화 중심 미술단체로, 근대 일본 서양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했다[1]. 구로다의 외광파(外光派) 화풍, 즉 밝은 자연광을 담아낸 온건한 사실주의 전통을 계승한 단체로서 별도의 혁신적 강령을 내세우기보다 기존 관전 계열의 품격을 유지했다[2][3]. 초기 창립을 이끈 인물로는 나카자와 히로미쓰야마모토 모리노스케미야케 가쓰미스기우라 히스이 등 구로다 문하의 중견 서양화가들과 디자이너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같은 해 6월 도쿄 우에노에서 제1회 광풍회전을 개최했다[2][4]. 특별한 주의주장을 표방하지 않았던 광풍회는 구로다의 지지를 얻어 결성된 후 매년 공모전을 통한 전람회를 열었고, 인상주의 이후의 새로운 미술 조류 속에서도 비교적 절충적이고 아카데믹한 화풍을 유지하며 일본 화단의 주류로 부상했다[5][6]. 이러한 광풍회전은 젊은 화가들에게는 등용문이 되었고 중견 작가들에게는 작품을 발표하고 실험해볼 장으로 기능하면서, 근대 일본 미술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으로 평가된다[4][7]. 또한 1950년대에는 회관을 설립하고 법인화되는 등 조직을 갖추어, 일수회 등과 함께 전후에도 일본 일전(Nitten) 체제를 떠받치는 유력 단체로 이어져왔다[8]. 광풍회 공모전은 이후 매년 지속되어 2014년에 제100회를 맞이했고, 이를 기념한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했다[9].

주요 회원과 일본 미술계에서의 영향

광풍회는 서양화(유화)와 공예 부문을 아우르는 구성으로 시작하여, 시대에 따라 많은 작가들이 거쳐 간 일본 미술계의 중심 무대였다[10][2]. 창립 직후 고바야시 만고남궁조(南薫造)아카마츠 린사쿠고지마 도라지로 등 당대 실력 있는 화가들이 회원으로 합류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 특히 광풍회는 관전(官展, 문부성 미술전람회와 그 후신인 제국미술원전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다수의 회원들이 분텐·테이텐(文展·帝展)의 수상자나 심사위원을 맡는 등 공모전 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했다[2][11]. 광풍회 회원들은 구로다 이래의 자연주의적 색채와 조형감각 위에 약간의 인상파적 기법을 도입한 스타일을 주로 추구하여, 전통과 현대성이 절충된 밝고 조화로운 화면을 집단적으로 선보였다[12]. 이러한 경향은 일찍이 일본 미술계의 안정적인 주류 양식으로 받아들여졌고, 광풍회는 전전(戰前)·전후를 통해 일본 근대 미술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1940년에는 일부 회원들이 중일전쟁의 현장을 그리기 위해 중국 대륙으로 파견되는 등 시대 상황에 협력하기도 했고, 전쟁 후에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대두로 회원들이 니카회신제작협회 등으로 이동하거나 분화하는 일도 있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풍회 자체는 21세기 현재까지 존속하며, 긴 역사를 통해 축적된 영향력으로 일본 미술 공모전 문화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광풍회가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몇 안 되는 미술 단체로서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방증한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화가들의 참여

흥미로운 점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시기에 조선인 청년 화가들 상당수가 광풍회의 무대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5][14]. 광풍회는 한국에는 비교적 생소한 이름이지만, 해외(일본) 유학 중이던 조선 출신 작가들이 다수 작품을 출품했던 대표적 그룹이었다[1][5]. 실제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으로서 김환기(1913-1974)김형근김종하김인승김원 등 여러 작가들이 광풍회전에 입선했고, 천재 화가로 칭해지는 이인성(1912-1950) 역시 광풍회 공모전에 출품해 특선을 수상한 바 있다[5][14]. 조선에서 최고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더불어, 일본 본토의 광풍회 공모전은 식민지 조선의 재능 있는 청년들에게 더 큰 무대를 제공했던 셈이다. 광풍회에서의 입상은 곧 일본 중앙 화단에서의 인정을 의미했기 때문에, 식민지 출신 화가들은 이 도전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지위를 높이고자 했다. 다만 당시 조선인 출품자들은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하고 문화적으로 동화 압력을 받는 등 어려움도 있었는데, 광풍회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경우였다. 이처럼 여러 한국인 화가들이 광풍회를 통해 일본 미술계와 교류하며 경력을 쌓은 사실은, 근대 동아시아 미술이 초국적 맥락에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광풍회는 제국 일본의 미술 플랫폼이었지만 조선인 화가들도 일정 역할을 함으로써, 미술을 통한 식민지-본국 간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변시지(1926-2013) 또한 광풍회를 무대로 두 문화권을 잇는 독자적인 경로를 걸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변시지와 광풍회: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

변시지(邊時志)는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 화가로서, 어린 시절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여 성장했고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다[15]. 1945년 학교를 졸업할 즈음 일본 패전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변시지는 계속 도일하여 도쿄로 상경, 당대 저명한 서양화가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받았다[16][17]. 데라우치는 일본 제국미술원 회원이자 영향력 있는 화단 원로로, 유럽 아카데믹 사실주의에 약간의 인상주의 터치를 가미한 절충적 인상주의 화풍을 추구하던 인물이다[18]. 변시지는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 아래 뛰어난 인물화 기법과 사실적 표현력을 연마했고, 자연스럽게 일본 서양화단의 주류 경향에 매료되어 주로 인물화를 그리며 화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12]. 그의 재능은 곧 공식 무대에서 인정받았는데, 1947년 도쿄에서 열린 제33회 광풍회전에서 첫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에 성공하였고 동시에 같은 해 일본 문부성 주최 일본미술전람회(日展)에도 처음 입선하였다[19]. 특히 1948년 제34회 광풍회 공모전에서는 불과 23세의 약관에 최연소로 광풍회전 최고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다[19][20]. 이는 식민지 출신의 한국인이 일본의 최고 권위 공모전에서 얻은 사상 초유의 성과로, 당시 일본 화단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21][14]. 변시지는 이 때 <베레모를 쓴 여인>과 <만돌린을 가진 여자등 인물화 2점을 포함한 4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최고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24][20]. 광풍회전 수상으로 이 작품은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광풍회 경험이 변시지 예술에 미친 영향

변시지가 광풍회에서 거둔 성공은 단순한 수상 경력 이상으로 그의 예술적 성장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광풍회 활동을 통해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서양화 기법과 평가 기준을 몸소 체득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데라우치 만지로를 비롯한 일본인 스승들과 교류하며 익힌 탄탄한 인체 데생, 사실적인 색채 운용, 유화 재료 사용법 등은 이후 그의 화업에 평생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광풍회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빛과 음영 처리, 인물의 질감 표현 등에서 프랑스 인상주의와 아카데믹 회화의 절충적 미감을 보여준다[25][26]. 이는 광풍회가 지향한 온건한 양화 스타일의 전형으로, 변시지는 이를 완벽히 소화하여 일본 화단이 추구하는 미의 규범을 따르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27]. 한편 광풍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변시지는 국제적 안목과 자신감을 얻었다. 젊은 조선인 화가로서 일본 미술계의 주류에 들어가 인정받은 경험은 그에게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을 주었고, 훗날 한국에 돌아와서도 예술적 자기정체성을 모색하는 데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광풍회 시절의 도전과 성취는 변시지에게 서양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그로부터 자신만의 그림 언어를 발전시킬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다.

또한 광풍회를 비롯한 일본 화단에서의 경험은 변시지 예술의 주제의식과 미학적 방향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 체류 시기의 변시지 작품들은 주로 도시 여성의 초상, 누드, 정물과 같은 인물 중심의 주제가 많았으며, 기술적으로도 사실적 묘사에 충실한 경향을 보였다[26]. 이는 일본 화단의 아카데미즘 전통과 광풍회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변시지 스스로도 당시에는 일본화가다운 냄새를 풍기는 작품을 그렸다고 회고된다[28]. 그러나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훗날 그가 한국적 소재와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할 때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예컨대, 일본에서 단련된 사실적인 드로잉 능력과 색채 감각은 그가 나중에 제주 자연을 그릴 때에도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광풍회에서 갈고닦은 기초 위에 한국적 정서와 철학을 입히는 과정이 변시지 예술의 후반기 변모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광풍회에서의 수학(修學)과 성과는 변시지가 동서양 미술 어법을 아우르는 작가로 성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귀국 이후의 변모와 동양 미학의 접목

변시지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초방으로 1957년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뒤로하고 돌연 한국 귀국을 결행했다[29]. 31세의 나이에 내린 이 결정은, 당시 일본에 남아 있기를 권유한 가족과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30][29]. 오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그가 식민지 출신 예술가로서 느낀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이었다고 한다[30][31]. 일본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이라는 의식,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타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그의 마음속에 쌓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귀국 후 변시지는 “예술가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회화적 사명감을 느꼈다”고 밝힌 바 있는데[31], 이는 민족적·예술적 자아 찾기를 위해 새로운 환경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 돌아온 변시지는 서울대학교에서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마포중고등학교와 서라벌예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자신의 화풍을 재정립하는 과제에 몰두했다[29]. 그러나 전후 서울 화단은 국전(國展) 중심의 아카데믹한 화풍과 인맥 위주 구조가 굳어져 있어서, 제주 출신에 일본 유학파였던 그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도 있었다[32]. 변시지는 이런 장벽을 극복하는 한편으로 한층 주체적인 미의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한국에서의 초기 작품들부터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귀국 직후 변시지는 이전에 즐겨 그리던 인물화에서 벗어나 한국의 자연과 전통 풍경에 눈을 돌렸다[33]. 1960년대 초반에 그가 즐겨 찾은 창덕궁 비원(秘苑)의 정원 풍경을 소재로 한 연작은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34]. 그는 개방된 비원의 고궁 정원을 날마다 드나들며 사생을 했고, 전통 정원의 나무와 정자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35]. 이때 변시지는 일본 시절의 외광파 화풍을 부분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가느다란 붓터치와 세밀한 묘사를 발전시켰는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작업은 이전의 인상파적 접근과는 다른 기법이었다고 평가된다[35]. 그 결과 화면 전체를 빠른 터치로 대략 처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옥 지붕의 기와나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그려내는 세밀풍경화 양식이 탄생했다[35]. 이러한 변화는 변시지가 귀국 후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모색하며 이루어낸 실험으로서, 한국적 소재를 서양화 기법으로 담아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변시지는 1975년 고향 제주도로 영구 귀향하면서 화풍의 완벽한 변모를 이루게 된다[36]. 15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50세에 제주에 정착한 그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깊은 자기성찰에 몰두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를 열어갔다[36]. 2년여 간의 시행착오 끝에 변시지는 자신의 화면에 황갈색의 독특한 빛을 입히기 시작했는데, 이는 제주를 둘러싼 황토빛 대지와 하늘의 색을 화폭에 끌어들인 것이었다[36][37]. 동시에 화면 위에는 과감한 먹색의 선묘(線描)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흙빛 바탕과 검은 선의 조합은 마치 한옥 창호지의 색감 위에 동양 수묵화의 필선을 얹은 듯한 효과를 자아냈다[37]. 실제로 변시지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형들이 익히던 서예와 묵화를 곁눈질로 본 기억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회고하는데[37], 제주의 풍토를 그리기 위해 동양적 필법을 접목시킨 이러한 시도는 그의 예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제 그의 작품에는 돌담, 초가집, 해녀, 조랑말, 까마귀 등 제주 고유의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과거의 사실주의적 묘사가 아닌 황갈색과 흑색의 간결한 형태로 재구성되어 화면에 놓였다[38].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대지와 파도치는 바다는 짧고 역동적인 붓질로 표현되고, 태양이나 배와 같은 형상은 단 몇 개의 굴곡선으로 상징화된다[39]. 때로는 하늘과 바다, 섬을 나누던 경계선조차 사라져 단색의 평면처럼 보이는 대담한 구성도 나타났다[39]. 이렇듯 자연의 빛과 바람은 변시지의 화면에서 색과 선으로 변주되어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변시지만의 제주풍경화가 탄생했다[39].

변시지 귀향 후 확립된 제주 양식의 작품 한 점. 황토색으로 물든 화면 위에 검은 선으로 간략히 묘사된 제주 바다와 오름, 말 등의 형상이 보인다. 이는 변시지가 동양의 수묵화적 요소(색감과 필선)를 서양 유화에 융합한 독창적 양식으로 높이 평가된다[1] [5] [6] [12] [14] [15] [17] [18] [20] [23] [24] [29] [31] [32] [34] [35] [36] [37] [38] [39] [40] [43] [46] 서울아트가이드 Seoul Art Guide

http://www.daljin.com/column/3415

[2] [3] [8] [10] 光風会(コウフウカイ)とは? 意味や使い方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word/%E5%85%89%E9%A2%A8%E4%BC%9A-63079

[4] [7] [9] [13] 光風会100年 ── 東京ステーションギャラリーで「洋画家たちの青春 ─ 白馬会から光風会へ」 | ニュース | アイエム[インターネットミュージアム]

https://www.museum.or.jp/news/3195

[11] 寺内万治郎 :: 東文研アーカイブデータベース

https://www.tobunken.go.jp/materials/bukko/9161.html

[16] [22] [45] 변시지(邊時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275

[19] [21] 변시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B3%80%EC%8B%9C%EC%A7%80

[25] [26] [27] [28] [30] [33] [42] [44] [47] 잊힐 수 없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

https://chanpark.tistory.com/entry/%EC%9A%B0%EB%A6%AC%EA%B0%80-%EA%BC%AD-%EC%95%8C%EC%95%84%EC%95%BC-%ED%95%A0-%ED%99%94%EA%B0%80-%EB%B3%80%EC%8B%9C%EC%A7%80

[41] 변시지 - 문화예술의전당

https://www.lullu.net/3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