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선의 시학
Wind and Line Poetry
변시지 화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바람과 선이라는 두 요소가 조용히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려한 수사나 거창한 선언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화폭 위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제주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도쿄의 골목을 거쳐 서울 한복판까지 이어집니다. 화가는 이 바람을 붓끝에 담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포착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 흔적만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마음이 작품들 사이로 스며 나옵니다.
라는 말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 그의 예술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선이 걸어온 길
처음에는 굵고 확실한 선들이었을 겁니다. 무언가를 확실히 그리고 싶은 젊은 화가의 의지가 담겨 있었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은 점점 가늘어지고, 때로는 끊어지기도 하며, 마침내 점 하나로 수렴해 갑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복잡한 형태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여백일까요?
사이에서 머무는 시간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개인의 목소리와 시대의 요구 사이에서 화가는 늘 고민했을 것입니다. 명확한 답을 찾기보다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작품들 속에 스며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가 어쩌면 그의 예술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여백이 건네는 말
그의 후기 작품들을 보면 점점 비워지는 화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무언가를 더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그리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서명조차 작아지고, 색채도 절제되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화가가 평생에 걸쳐 도달한 깨달음의 편린을 엿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