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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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 표지 (공익재단 아트시지, 2021).

  1. 출판 정보: 황학주 시인의 예술산문집 **『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은 2021년 공익재단 아트시지(Art Shiji)에서 초판 발행되었다. 43편의 산문과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수록한 93쪽 분량의 아트북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2022년 1월 PDF 전자책으로도 출간되었다 (ISBN: 979-11-976286-0-3 / 979-11-976286-1-0(전자책))
  2. 작품 개요 및 주요 내용: 이 책은 제주 출신 변시지(1926~2013) 화백의 그림 43점을 보고 황학주 시인이 느낀 바를 글로 풀어낸 산문 모음집이다. 각 산문의 제목이 곧 해당 그림의 제목으로, 기다림태풍제주 해녀절망서귀포 등 제주의 자연 풍광과 삶을 담은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황학주는 그림 한 점 한 점에서 포착한 정서를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메시지로 확장한다. 예를 들어 1985년 작 그림「기다림」을 보고 쓴 글에서는 “삶의 첫번째 원칙은 기다림이며 기다림은 기다림 다음에도 기다림”이라는 통찰을 끌어내어 기다림의 의미를 사색한다. 이처럼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와 분위기를 시인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3. 문학적 형식과 구성: 형식적으로는 운문 시가 아닌 산문 형식의 글들이며, 그림과 글이 짝을 이루는 예술 산문집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을 ‘산문화집’이라고 칭하며, 산문(散文)과 화집(畫集)의 결합이라는 성격을 강조했다. 전체 구성은 43편의 산문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은 것이며, 각 산문은 독립적이면서도 모두 변시지의 그림에 대응되는 짧은 글이다. 목차에서 보이듯 각 글의 제목이 곧 그림 제목이므로 그림 감상의 순서를 따라 글이 배열되어 있다. 한 편 한 편이 산문시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비록 형식은 에세이 같지만, 내면에는 시적인 운율과 울림이 살아있는 구성을 보인다.
  4. 변시지와의 관계: 이 산문집 자체가 변시지 화백에 대한 헌정이라 할 수 있다. 황학주 시인은 변시지의 작품 한 점 한 점에서 받은 영감과 정서를 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화가와 교감을 시도했다. 실제로 황학주는 제주 이주 후 기당미술관의 변시지 상설전시관을 자주 찾고 손님들에게도 소개할 정도로 변 화백의 그림에 친숙했으며, 이러한 개인적 애호가 결국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책 속 모든 글은 변시지의 그림이 매개인 만큼 화가의 삶과 예술혼이 배어 있다. 예컨대 화가의 1985년 작 「기다림」이 전하는 고독과 인내를 시인은 “삶의 첫번째 원칙은 기다림”이라는 문장으로 응축했고, 1993년 작「위로」를 보고는 “죽을 것 같을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화답했다. 이렇듯 황학주의 글은 변시지의 그림에 담긴 정서와 메시지를 거울처럼 비춰주며, 화가의 작품 세계와 시인의 사유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5. 시적·미학적 특징: 황학주의 문장은 회화적 이미지와 시적 언어가 어우러진 점이 특징이다. 변시지 특유의 황톳빛 색감과 거친 풍경, 폭풍과 바다, 그리고 폭풍 앞에 서 있는 삐쩍 마른 고독한 남자의 형상이 글 속에 그대로 되살아난다. 예를 들어 “노란색 화풍”과 “폭풍 앞에 서 있는 남자”와 같은 그림의 인상적인 소재들이 시인의 비유와 묘사로 재현되고, 돌담 위의 까마귀나 해녀 같은 제주적인 상징들이 자주 등장한다. 전반적인 정서는 쓸쓸함과 고독, 허무의 정조가 짙게 깔려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포착하는 서정성이 돋보인다. 한 평론가는 황학주의 시 세계를 두고 “미학주의와 허무주의의 찬란한 융합”이며 “독거(獨居)의 아름다운 높이와 깊이”를 보여준다고 평했는데, 실제로 이 산문집에서도 황량한 풍경 속에 녹아있는 깊은 고독을 아름답게 승화하는 시인의 미학을 확인할 수 있다. 문체는 대체로 담담하고 명징한 서술 속에 간결한 철학적 어구를 담는 심플하면서도 울림 있는 스타일로, 때때로 같은 어구를 반복하거나 대비시키며 여운을 남긴다 (앞서 인용한 “기다림”이라는 단어의 반복 등). 이러한 언어적 절제와 함축을 통해 그림이 전하는 여운을 글로서 효과적으로 구현한 점이 돋보인다.
  6. 감상 포인트 및 문학·예술적 의의: 그림과 문학의 만남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독자는 책에 실린 변시지의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에 대응하는 황학주의 글을 읽음으로써,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시너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림이 품은 색감과 분위기를 시인의 언어가 섬세하게 풀어주기 때문에, 그림을 찬찬히 감상한 뒤 글을 읽거나 혹은 글을 먼저 읽고 그림을 보면 서로의 의미가 배가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 원로 화가의 예술혼에 화답했다는 점에서 문학과 미술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도 평가된다. 황학주 시인의 통찰은 그림이 담지한 정서를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여 독자에게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예술적 위로와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실제로 황학주의 글에서 비롯된 “죽을 것 같을 때 위로를 받으면 죽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은 변시지 화백 추모 행사에서 힐링과 위로의 메시지로 인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은 단순한 그림 해설을 넘어, 예술 간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으로서 문학적·예술적 의의를 지닌다.
  7. 시인의 인터뷰 및 비평적 해석: 황학주 시인은 그림 수집이 자신의 삶에 위안이 되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제주 정착 후 열린 한 전시회의 초대 글에서 그는 “그림 수집은 마음이 흔들렸던 순간의 기억”이라고 말하며, 어려운 시절마다 한 점씩 그림을 구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언급은 그가 왜 변시지의 그림들에 깊이 매료되었는지 짐작하게 하며, 본 산문집이 탄생한 배경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문단의 비평적 시각에서 볼 때, 황학주의 작품은 오래전부터 독특한 예술세계로 인정받아 왔다. 이광호 평론가는 그의 시에 대해“애매성의 매혹”이 있다고 평했고, 박덕규는 “서정적 서사시의 개척자”라 불렀으며, 이숭원은 “미학주의와 허무주의의 찬란한 융합”과 “독거의 아름다운 높이와 깊이”를 갖춘 시인이라 평했다. 이러한 비평들은 황학주 시인의 전반적인 문학세계를 향한 것이지만, 변시지의 그림을 다룬 이 산문집 역시 그의 서정성과 서사성, 미학적 탐구가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물로서 이러한 평가와 맥을 같이한다. 요컨대, 황학주 본인의 말과 평단의 해석 모두에서, 그의 작품이 지닌 위안과 미학적 깊이가 강조되고 있으며,『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은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