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계의 속도에서 기후의 호흡으로
역사적으로 모더니즘은 단절과 가속의 서사였습니다. 강철과 유리, 기계적 운동감, 그리고 형태의 자율성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그 무대는 늘 분주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구 중심의 서사는 또 다른 모더니즘의 계보를 가려왔습니다. 바로 기계가 아닌 "풍토(Climate)에 의해 빚어진 모더니즘입니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는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의 캔버스는 단순히 제주라는 특정 지역의 풍경을 재현하거나 향토적 정취를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기후는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적 조건"입니다.
2. '마른 풀잎색'이 증언하는 노출의 시간
흔히 변시지의 화면을 지배하는 색을 황토색이나 노란색으로 규정하곤 하지만, 그것은 가시적인 광학 데이터에 매몰된 해석일 뿐입니다. 그 색의 진실은 "마른 풀잎색"에 있습니다. 이는 제주의 거친 햇볕과 짠 바람에 바랜 생명력이 남긴 흔적이며, 시간의 켜가 쌓인 존재의 질감입니다.
변시지의 화면 속에서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무와 말, 초가집, 그리고 인간을 하나의 방향으로 굴절시키는 "형성적 힘(Formative Force)"입니다. 모든 존재가 바람의 결을 따라 기우는 '방향적 응집성'은 미학적 양식이 아니라, 가혹한 자연에 노출된 존재가 취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정렬"입니다. 이는 와쓰지 데쓰로가 말한 '풍토(Fūdo)', 즉 환경과 인간이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적 구조와 맞닿아 있습니다.
3. 유배의 여백, 거주로서의 비움
그의 작품에서 여백은 유럽 추상미술의 형이상학적 허공과는 결을 달리합니다. 변시지의 비어 있는 공간은 부재가 아니라 "거주(Dwelling)"의 장소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거주를 건축적 행위가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했듯, 화백의 화면을 채운 광활한 마른 풀잎색의 공간은 숨 쉴 수 있는 공간, 즉 인간의 자세가 비로소 가시화되는 조건이 됩니다.
"예술의 모태는 풍토다."
화백의 이 좌우명은 그의 여백에서 찬란하게 피어납니다. 고립된 섬으로의 유배는 절망이 아니라, 불필요한 수식어를 걷어내고 존재의 순수함에 도달하게 하는 축복의 과정입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필치로 그려진 외로운 노인과 까마귀는 이 거대한 여백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4. 반복의 리듬과 영토화
화면마다 반복되는 최소한의 모티프들—홀로 선 노인, 기우뚱한 말, 위태로운 초가—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영토화(Territorialization)' 개념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극심한 기후적 압력 속에서 일정한 리듬과 재귀적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인식을 안정시키려는 시도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이 문법은 사실 풍토라는 압도적인 힘 속에서 존재의 방향을 재구성하는 구조적 뼈대입니다.
5. 세계 미술사 속의 변시지: 비교의 언어
변시지의 예술은 동시대 국제적 거장들과 나란히 놓일 때 그 독창성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 vs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 키퍼가 역사의 비극과 트라우마를 거대한 기념비로 세운다면, 변시지는 풍토라는 일상적 존재론을 수행합니다.
- vs 앤디 골즈워디 (Andy Goldsworthy): 골즈워디의 작업이 자연의 시간 속으로 소멸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변시지는 그 노출의 순간을 영구적인 회화적 구문(Syntax)으로 정착시킵니다.
- vs 아니시 카푸어 (Anish Kapoor): 카푸어의 빈 공간이 관찰자를 빨아들이는 심연의 공허라면, 변시지의 비어 있음은 생명을 품고 보호하는 '쉘터(Shelter)'로서 기능합니다.
결론: 풍토 모더니즘의 선언
"풍토 모더니즘"은 노출과 인내, 그리고 거주에 뿌리를 둔 현대 미술의 새로운 계보입니다. 모더니즘이 현대적 존재의 예술적 발현이라면, 변시지 화백은 풍토 자체를 존재의 지반으로 렌더링한 첫 번째 예술가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의 붓질은 토속적 서정처럼 낮고 깊으며, 서민의 한(恨)처럼 애절하지만, 동시에 섬세한 내면의 파동을 놓치지 않습니다. 폭풍 전야의 거친 선들 사이로 피어나는 생명력,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변시지라는 거대한 풍토를 읽어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