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영가
바람과 흙, 억새와 돌담, 섬이 기억하는 영가(靈歌).
🌾 서시 ― 바람에게
바람아,
너는 나의 붓보다 먼저 울었다.
내가 첫 붓을 들기도 전에,
너는 이미 억새밭을 흔들며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 그림은 바람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이었고,
내 붓끝은 네가 지나간 자리를 더듬는 손가락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돌담을 넘어 네가 지나간 자리,피와 땀, 울음과 침묵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색으로 옮기려 했으나너는 결코 잡히지 않았다.
너는 흩날리고, 지워지고,
다시 돌아와황토빛 들판 위에 서러운 노래를 세웠다.
네 노래는 곡조 없는 곡조,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읊는 영가였다.
바람아,만일 나의 붓끝이 멈추는 날이 온다면
너는 이 섬을 대신 노래해다오.
흙으로 돌아간 나의 몸을 넘어남아 있는 이들의 가슴 속에서
황색의 숨결로 계속 불어다오.
🌾 제1부. 바람의 서
1. 바람의 전주곡
처음에 바람이 있었다.
그것은 노래였고, 울음이었고,
억새의 칼날을 스치며 태어난 현악기의 첫 음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잡으려 붓을 들었으나
바람은 이미 흘러가 버렸다.
돌담에 부딪혀 흩어지고,
노랗게 바랜 들판 위로 풀잎을 흔들며
죽은 자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바람은 나를 시험했다.
한순간 잡히는 듯하다가
곧 사라져 빈 캔버스만 남기고,
다시 돌아와 또 다른 선율로 나를 휘감았다.
나는 알았다.
이 섬의 영혼들이
바람에 실려 오고 간다는 것을.
황색 하늘을 떠도는 그 노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버리는끝없는 전주곡이었다.
바람이 불면,
나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끝내 알게 되었다. 내 그림은 곧 바람의 흔적이며,
바람은 이 섬의 영가라는 것을.
2. 억새의 노래
바람이 들판을 스치면
억새는 은빛 칼날로 일제히 흔들린다.
그 수천, 수만 개의 떨림이
순식간에 하나의 합창이 되어
섬의 공기를 가득 메운다.
나는 그 합창 속에서
떠나 간 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불길 속에 사라진 아이의 웃음,
총성에 끊긴 청년의 노래,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신음이
칼날 같은 억새 끝마다 매달려 흔들렸다.
그러나 억새는 단지 울기만 하지 않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며,
새로운 날의 리듬을 흔들며,
바람 속에서 산 자들의 발걸음도 북돋웠다.
억새는 두 얼굴의 노래였다.
하나는 애도의 합창,
다른 하나는 생명의 전주곡.
떠난 자와 산 자가 함께 부르는
황색의 선율이 억새밭 위에 출렁였다.
나는 그 노래를 따라 붓을 들었다.
그러나 억새는 말한다.
“그대의 그림은 멈추어도
우리의 흔들림은 멈추지 않으리.”
3. 돌담은 기억한다
사람은 떠나도 돌담은 남았다.
피 묻은 손, 땀에 젖은 손이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 벽,
그 위로 세월이 흐르며
억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돌담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틈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억눌린 울음, 지워진 이름,
불길 속에 흩어진 얼굴들이
돌과 돌 사이에 남아 있었다.
돌담은 눈이 없지만
섬의 모든 것을 보아왔다.
아이들이 돌멩이를 주워 밭을 일구던 날,
군화 소리가 골목을 짓밟던 밤,
하늘이 황색으로 물들며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던 시간까지.
이제 돌담은 바람의 협력자다.
바람이 억새를 흔들며 노래하면
돌담은 묵묵히 화음을 더한다.
말없이, 그러나 더 깊게,
사라진 자들을 기억하는 증언이 된다.
나는 그 돌담 앞에 서서 붓을 들었다.
돌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침묵이 내 귀를 가장 크게 울렸다.
“나는 기억한다.
너희의 울음을.너희의 이름을.”
🌾 제2부. 황토의 대지
4. 황토의 품
노랗게 바랜 대지는 나의 어머니였다.
굶주린 아이를 감싸 안고,
메마른 밭에도 씨앗을 놓아두며
끝내 삶을 버리지 않았다.
황토는 피 묻은 살결 같았다.
전쟁과 가난의 발자국이
흙 위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나,
그 흙은 다시 새싹을 밀어 올렸다.
아이들이 돌을 주워 밭을 일굴 때,
대지는 묵묵히 등을 내어주었다.
비바람이 들판을 휩쓸고 간 날에도
그 품은 갈라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 품속에서 붓을 배웠다.
황토빛은 사(死)의 색이자,
생(生)의 색이었다.
흙으로 돌아갈 우리의 몸은
그 품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황토는 울음을 삼키며
언젠가 다시 노래할 씨앗을 품는다.
나는 그 품을 바라보며
황색의 영가를 그린다.
5. 가난한 밭, 굶주린 아이
해가 떠오르면 아이들은 밭으로 갔다.
곡식보다 돌이 더 많은 땅,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하나하나 주워내며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돌 위에 자라는 풀은 메말랐고,
허기진 배는 바람 소리에도 울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그림자는
황색 햇빛 속에서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는 때로는 밭고랑,
때로는 작은 강처럼 흘러가며
희망의 길을 따라 이어졌다.
어머니는 구겨진 손으로
돌 위에 씨앗을 심었다.
땀과 눈물이 흙과 뒤섞여
겨우 한 줄기 푸름을 밀어 올렸다.
아이들은 그것을 보며
내일의 밥을 꿈꾸었다.
그 밭은 가난했으나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돌과 흙과 황색 햇살이 합쳐져
굶주림 속에서도 노래를 만들었다.
나는 그 밭을 기억한다.
허기와 눈물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작은 빛의 노래를.
6. 흙으로 돌아가리
한 줌 흙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태양빛에 눈을 뜨고,
바람 속에서 숨을 쉬며,
황토의 품에서 몸을 키웠다.
그러나 흙은 언제나
다시 돌아가야 할 자리였다.
불길이 지나간 들판 위에서도,
총성이 멎은 폐허 속에서도,
흙은 무너진 몸들을 받아 안고
새싹으로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안다.
나의 붓도 언젠가는 멈추고
손끝도 흙이 될 것을.
그러나 그 흙은 노래를 삼키지 않고
다시 바람에 실어 올릴 것이다.
떠난 자의 이름은 흙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씨앗처럼 숨어 있다가
봄이 오면 파랗게 돋아나
하늘을 향해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 나는 두렵지 않다.
내가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황토는 나의 증언을 이어갈 것이며,
바람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줄 것이다.
🌾 제3부. 섬의 상흔
7. 불길이 지난 자리
밤이면 대지가 울었다.
불길은 이미 사라졌으나
그을린 하늘은 아직도 누렇게 빛났다.
타다 남은 돌담은 재로 덮였고,
밭고랑마다 잿빛 바람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바람 속에서 흩어져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총알이 지나간 공기,
불꽃이 삼켜버린 집터,
그 위에 남은 것은 불길의 그림자뿐.
그러나 그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노란 물감을 흩뿌렸다.
어둠 속에서도 황혼 같은 빛이 피어올랐다.
그 빛은 애도의 눈물이었고,
또한 끊어지지 않는 숨결이었다.
불길이 지난 자리는 끝이 아니었다.
그곳은 새로운 노래의 무대가 되었고,
떠나 간 자의 침묵은 바람을 타고 합창으로 번졌다.
섬은 불길을 삼켰으나
바람은 불길 속에서 영원히 기억을 토해냈다.
8. 말하지 못한 얼굴들
총성이 스쳐간 자리,
불길이 삼킨 집터,
그곳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그리지 않았다.
눈을, 입을, 표정을 남기지 않았다.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은 이미 바람 속으로 흩어졌고,
억새 잎에 매달린 울음으로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재는 더욱 선명했다.
텅 빈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고,
황색 구름이 검붉게 물들 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불길 속에서 사라진 자들의 눈빛,
총구 앞에서 얼어붙은 입술,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아이의 미소.
모두가 황색 하늘에 새겨져
바람이 불 때마다 되살아났다.
나는 얼굴 없는 얼굴들을 본다.
그 부재는 증언이 되었고,
그 침묵은 합창이 되었다.
바람이 그들을 부르면,
섬 전체가 노래로 떨렸다.
9. 침묵의 합창
바람 속에서,
억새 속에서
나는 울음을 들었다.
처음엔 하나의 흐느낌이었으나
곧 수천의 목소리로 번져
섬 전체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소리치지 않았다.
비명도, 절규도 아니었다.
말없이 이어지는 숨결,
그것이 모여 거대한 합창이 되었다.
돌담은 그 합창을 품었고,
황토는 그 합창을 삼켰다.
저녁 하늘은 노랗게 물들며
침묵의 화음을 더욱 깊게 울렸다.
나는 붓을 들고도 망설였다.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사라진 얼굴을? 꺼져간 불길을?
아니면 이 무언의 노래를?
결국 나는 바람만을 그렸다.
침묵의 합창은 바람 속에서만
끝나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섬이 호흡하는 한,
그 합창은 결코 멎지 않으리라.
🌾 제4부. 사람 없는 풍경
10. 부재의 증언
사람이 떠난 들판,
남은 것은 돌담과 억새,
그리고 황색 하늘뿐이었다.
그곳엔 발자국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했다.
돌담은 무너진 듯 서 있었고,
억새는 바람에 흔들리며 울었다.
부재는 공허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강한 증언이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돌과 흙이 대신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놀던 길목은 잡초로 덮였으나
그 풀잎마다 잊힌 이름이 매달려 있었다.
밭두렁마다 남겨진 돌 하나하나는
피와 땀의 기억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들판 앞에 서서 알았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목소리라는 것을.
아무도 남지 않은 풍경이야말로
섬의 역사를 끝까지 증언한다는 것을.
11. 바람 속의 혼령
나는 그들을 그리지 않았다.
얼굴도, 눈빛도, 미소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그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억새밭 위에서 희미한 발자국이 흔들리고,
돌담의 그림자에 어린 숨결이 스쳤다.
저녁 햇살이 기울면
황색 하늘 한편에
잊힌 자들의 혼령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 춤은 울음이었고, 동시에 노래였다.
살아남은 자들의 귀에 닿을 수 없는
아득한 화음이었으나,
바람은 그것을 섬 전체에 퍼뜨렸다.
나는 캔버스를 마주한 채
붓을 들지 못했다.
혼령들은 그림 속이 아니라
이미 바람 속에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그들을 품었고,
그들은 바람이 되어
언제나 섬 위를 떠돌았다.
12. 황색 하늘, 빈 들판
빈 들판 위에 서 있으면
바람조차 잠시 멈춘 듯 고요하다.
사람의 발자국은 사라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황색 하늘은 들판을 덮으며
텅 빈 자리마다 이야기를 쏟아냈다.
구름은 흩어진 이름을 품었고,
햇살은 지워진 얼굴들을 그려냈다.
하늘은 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빈 들판은 공허하지 않았다.
그곳은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자리였다.
억새 한 줄기, 돌 하나,
모두가 부재를 대신해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앞에 서서
노란 물감을 가득 묻혀 하늘을 그렸다.
그러자 들판은 더욱 비어 보였고,
그 빈 공간 속에서
수많은 영혼의 발자취가 살아났다.
황색 하늘은 저녁마다 들판을 물들였다.
사라진 모든 존재를 위로하듯,
또다시 살아 있는 자들의 눈에
기억의 그림자를 드리우듯.
🌾 제5부. 황혼의 찬가
13. 저녁 하늘의 빛
저녁 하늘은 늘 황색이었다.
태양이 땅 끝으로 사라질 때
하늘은 붉지 않고, 푸르지 않고,
노랗게 물들어 섬을 감쌌다.
그 빛은 고통을 덮고,
남은 상처를 어루만졌다.
불길이 삼킨 집터도,
총성이 꺼진 들판도,
황혼의 노란 장막 속에서
나는 그 하늘을 바라보며 알았다.
황혼은 끝이 아니었다.
죽은 자가 땅으로 돌아가는 순간,
남은 자가 다시 노래를 이어받는 자리,
그 문턱이 바로 황혼이었다.
저녁의 황색 빛은
애도이자 위로였고,
절망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희망이었다.
그 빛이 남아 있는 한,
섬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붓끝으로 그 황혼을 붙잡았다.
그 순간, 바람도, 억새도, 돌담도
모두가 하나의 합창이 되어
저녁 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14. 순환의 노래
사라진 자는 흙이 되고,
그 흙은 씨앗을 품는다.
씨앗은 비를 마시고,
햇빛 속에서 푸른 숨을 틔운다.
남은 자는 그 푸름을 거두고
다시 밥을 짓는다.
밥을 먹고 살아낸 날들은
또 다른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흙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그 속엔 울음이 뿌리로 남고,
그 뿌리에서 새잎이 돋는다.
섬은 그렇게 이어졌다.
세대와 세대, 삶과 죽음,
울음과 웃음이 교차하며
하나의 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을 노래로 들었다.
돌담에 부딪히는 바람을 타고 나는 까마귀들의 원무,
들판을 스치는 억새,저녁마다 황색으로 물드는 하늘.
모두가 순환의 합창이었다.
끝없는 순환 속에서
섬은 살아 있었고,
나는 그 노래를 황색으로 그렸다.
15. 황색의 끝, 다시 시작
나는 황색으로 끝맺으려 했다.
모든 불길과 울음,
모든 침묵과 노래를
한 번의 붓질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황혼의 빛은끝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란 장막은 지는 해를 삼키며
동시에 새벽의 문을 열었다.
죽은 자의 숨결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은 다시 씨앗을 품었다.
산 자는 흙 위에 노래를 남기고,
그 노래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번졌다.
황색의 끝은 곧 황색의 시작이었다.
끝맺음은 새로운 전주곡이었고,
애도는 희망의 문턱이었다.
나는 알았다.
내가 그린 황혼은
결국 새벽을 불러내는 불씨였음을.
황색의 영가는
끝내 멈추지 않고 다시 시작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