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모더니즘의 존재론적 토대: '제3의 길'

K-모더니즘의 존재론적 토대: 변시지와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의 '제3의 길'

20세기 한국 근대 미술 담론은 식민지적 경험과 '지체된 근대성'이라는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토양 위에서 등장한 **K-모더니즘(K-Modernism)**은 단순한 양식적 흐름이 아니라, 기존의 이분법적 틀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파열을 의미합니다. 특히 화가 변시지(1926–2013)의 작업은 도쿄와 서울이라는 중심지에서 제주라는 변방으로 회귀함으로써, 서구화되지 않으면서도 전통에 매몰되지 않는 독창적인 현대성을 구현한 K-모더니즘의 핵심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1. K-모더니즘의 부정적 규정 (Via Negativa)

K-모더니즘을 학술적으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지향하지 않는 바를 명확히 하는 '부정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 절충(Synthesis)의 거부: K-모더니즘은 동양과 서양의 요소를 적당히 혼합한 '절충주의'가 아닙니다. 절충은 양자의 고유한 힘을 희석하는 타협을 전제로 하지만, K-모더니즘은 동서양을 고정된 극점으로 보는 전제 자체를 거부합니다.   
  • 모방(Imitation)의 거부: 20세기 한국 미술사에서 흔히 나타난 외래 양식의 단순 수용이나 '번역'된 언어(인상주의, 추상주의 등)를 단호히 배격합니다. 이는 타자의 언어로 말하는 '복복술(ventriloquism)'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합니다.   
  • 향수(Nostalgia)의 거부: K-모더니즘은 문화 보존을 명목으로 전통을 박제화하거나 과거를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민속적 모티프나 고전적 형식을 재현함으로써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지양하며, 현재적 삶의 실존에 집중합니다.   

2. 제3의 길: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획득

K-모더니즘이 제안하는 '제3의 길'은 동과 서, 현대와 전통 사이의 중간 지대가 아니라, 이분법적 선택지 자체를 무효화하는 근원적인 경로입니다.

변시지의 예술 철학에 따르면, 작가는 "어떤 언어로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는 도쿄에서 습득한 서구적 기법(유채, 캔버스, 구도 원리)이라는 '가시적인 도구'를 사용하되, 이를 통해 포착하고자 한 것은 '대지의 보이지 않는 숨결'이었습니다. 이는 서구적 도구성을 수단화하면서도 그 내러티브는 지역적 특수성(제주의 풍토, 빛, 바람)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인고와 고독—에 도달하는 역설적 과정을 보여줍니다.   

3. 결정적 전회: 1978–1979년의 파열과 뿌리내림

K-모더니즘의 탄생은 변시지의 작품 세계에서 나타난 상징적 하강의 몸짓에서 발견됩니다.

  • <전선 위의 까마귀>(1978): 현대성의 상징인 전선 위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까마귀들은 "어디에 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문명의 이기(전선)와 자연적 근원(지면) 사이에서 부유하는 근대인의 초상입니다.   
  • <횡보(橫步)>(1979): 1년 후, 작가는 전선에서 내려와 거친 대지 위를 걷는 고독한 단독자의 형상을 제시합니다. 이 '하강'은 빌려온 카테고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특정한 토양(제주)에 자신을 심겠다는 결단입니다.   

이후 변시지의 작업은 제주의 화산토를 닮은 황토색 단색조로 수렴되며, 굽은 소나무, 조랑말, 바람에 맞서는 인물 등 원형적 도상으로 응축됩니다. 이는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성을 파고들어 보편이라는 수맥에 닿으려는 시도입니다.   

4. K-모더니즘의 형식적 특징과 미학

  • 황토색(Ochre)의 심리적 공간: 변시지는 제주의 강렬한 빛 아래 모든 사물이 황토빛으로 투사되는 현상을 포착했습니다. 이는 제주의 화산토와 '갈중이'(전통 작업복)의 색이자, 동양 우주론에서 만물의 근원인 지(地)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 바람의 시각화: 바람을 직접 그리는 대신 바람이 닿는 대상(기운 소나무, 펄럭이는 치마, 흩날리는 말갈기)의 운동감을 통해 보이지 않는 힘을 현시합니다.   
  • 동양적 구도와 서양적 매질의 결합: 유채라는 서양적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여백(Ma-baek), 비대칭성, 서예적 필선 등 동양적 공간 경영의 원리를 유지합니다.   
  • 거부의 미학: 장식, 내러티브, 상징주의를 거부하고 본질만을 남기는 극단적인 절제를 지향합니다.

5. 학술적 의의: 스미스소니언과 보편적 가치

2007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이 변시지의 작품 <난무>와 <가는 길>을 10년간 전시용으로 선정한 것은 K-모더니즘의 보편적 가치를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큐레이터 캐롤 네이브스(Carole Neves)는 그를 "한국의 살아있는 보물"이라 칭하며, 지극히 지역적인 소재가 어떻게 국경을 넘어 인간 영혼의 심층적 고독과 위안에 닿을 수 있는지를 강조했습니다.   

K-모더니즘은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독창성은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거나 외부의 유행을 좇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 아래로 깊이 파고 내려가 실존적 진실의 암반에 도달할 때 비로소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변시지의 K-모더니즘은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미술(Fine Art)을 넘어 '정신적 울림'을 추구하는 예술(Art)로의 이행을 보여줍니다. 그는 황토색, 침묵, 그리고 고독이라는 언어를 통해 번역이 필요 없는 인류 공통의 경험—인고와 존재의 의지—을 노래했습니다. K-모더니즘은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