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와 실존주의
풍토 속의 실존: 변시지,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사르트르의 미학적 교차점

풍토 속의 실존: 변시지,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사르트르의 미학적 교차점

서론 · 세 겹의 풍토, 세 개의 목소리

“인간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지리적 좌표를 묻는 것을 넘어, 던져진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탐구한다. 20세기 중반, 이 질문에 세 인물이 각기 답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선언했고,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전후(戰後) 유럽의 트라우마를 캔버스 위의 비명과 뒤틀린 육체로 형상화했다. 한국의 화가 변시지는 제주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 일본의 제국주의, 청년기 서울의 분단과 전쟁, 말년 제주에서의 4·3의 상흔이라는 삼중의 역사적 풍토를 겪으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예술로 탐구했다.

변시지는 일본 오사카 유학 시절 서양화의 아카데미즘 기법을 익혀 1948년 ‘광풍회’ 공모전에서 역대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1975년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와 이후 45년간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이처럼 변시지의 삶은 식민의 제국, 분단의 서울, 학살의 제주라는 삼중의 폭력적 풍토 속을 지나간 여정이었다. 이 세 인물을 하나로 엮는 철학적 키워드는 “풍토(風土)”이다. 일본 철학자 와츠지 데쓰로는 풍토를 단순한 자연환경을 넘어 인간 존재를 둘러싼 총체적 조건으로 보았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상황 속의 자유”임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뒤틀린 인체는 전후 유럽이라는 풍토가 남긴 트라우마의 흔적이며, 변시지의 그림은 제국주의, 전쟁, 학살이라는 세 겹의 풍토를 통과한 그의 실존적 응답이다. 본 글은 변시지 예술을 중심에 두고, 그의 예술세계와 연관된 풍토 개념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다:

  • 실존의 조건으로서 풍토는 어떻게 예술적 형식을 규정하는가?
  • 전후의 폐허와 폭력이라는 공통된 상황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예술가는 어떻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르게 탐구했는가?
  • 변시지는 일본의 아카데미즘, 서울의 전통, 제주 자연이라는 삼중 풍토를 거치며 어떻게 동·서양 기법을 통합하고, 제주의 특수한 소재를 보편적 인간성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는가?

이 글은 위 질문들에 대해 변시지를 축으로 사르트르와 베이컨의 작업을 풍토론과 함께 비교·사유하는 예술철학적 여정이다.

1부: 풍토와 실존의 변증법

1.1 와츠지의 풍토론과 사르트르의 상황 개념

와츠지 데쓰로는 『풍토(風土)』(1935)에서 기후와 지리, 역사로 이루어진 환경이 인간의 사유와 감성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그는 몬순(습윤적 기후)과 사막(극한의 열기)과 목초지(온화한 초원) 등 각기 다른 풍토가 서로 다른 인간성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풍토는 단순한 물리적 배경을 넘어서 사람과 문화의 형태를 길러내는 근원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사르트르의 경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절대적 자유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그는 그 자유가 비연속적 상황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자유를 “‘상황 속의 자유’”로 정의하며, 자유는 다양한 조건에 의해 제약됨을 강조했다. 요컨대, 와츠지의 풍토와 사르트르의 상황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특정한 풍토와 역사를 가진 환경에 태어나며, 그 조건이 우리 행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형성한다. 와츠지가 풍토의 규정성을 강조했다면, 사르트르는 바로 그 풍토 안에서 주체가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갈 가능성(기투project)을 모색한다고 할 수 있다.

1.2 전후 풍토: 폐허 위의 실존

20세기 중반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이념 대립으로 인류 문명이 붕괴된 시기였다. 전통적 가치와 합리성은 무너졌고, 이른바 ‘의미의 공백’ 상황이 조성되었다. 사르트르는 이를 초월적 질서가 사라진 상태, 즉 “신의 죽음” 이후의 상황으로 해석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고, 그 자유는 동시에 깊은 불안과 마주함을 뜻한다. 베이컨은 바로 이 불안을 캔버스에 담았다. 일례로 DailyArt 기사에 따르면, 베이컨은 “어둡고 왜곡된 형상들이 가득한 섬뜩한 세계”를 창조했는데, 이는 그의 트라우마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의 인물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신체는 해체된 듯 왜곡된다. 이 형상들은 단순한 그로테스크가 아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의 시선 앞에 선 인간은 대상화되고 자유가 제한된다. 베이컨은 투명한 상자나 틀 안에 인간을 가두어 마치 감옥이나 도살장의 풍경을 연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타자의 시선이 개인을 짓누르는 폭력을 시각화했다. 전통적 재현을 거부한 그는 “자신의 신경계를 캔버스에 옮기고 싶다”고 말한 바 있으며, 캔버스 위에 폭력의 흔적을 직접 그려 넣음으로써 관람자가 그 고통을 직시하도록 하는 ‘증언의 미학’을 택했다.

1.3 변시지의 삼중 풍토: 폭력의 지층학

프랜시스 베이컨이 단일한 전후 유럽의 트라우마에 반응했다면, 변시지가 겪은 풍토는 세 겹의 폭력이 층층이 쌓인 지층과도 같았다.

제국의 풍토 (일본)

변시지는 6세에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데라우치 만지로에게 사사받으며 서양 근대 미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1948년 22세의 나이에 일본 최고 권위의 공모전인 ‘광풍회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러나 그 성공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과 허전함”이 존재했다. 당시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일본인의 기질과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린다고 평할 만큼, 화려한 기술 너머에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드러났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결국 그를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1957년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미술계에서 인정받았지만 정체성의 불일치와 강렬한 폭력의 시대상을 동시에 체감한 시기였다.

분단의 풍토 (서울)

해방 후 귀국한 변시지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일본 유학파라는 이유로 동료들의 질시를 받으며 1년 만에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는 창덕궁 후원(비원) 주변을 무대로 비원파(秘苑派)로 활동하며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장르를 바꿔 한국적 아름다움을 탐색했다. 예를 들어 「가을 부용정」은 기왓장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여전히 일본에서 익힌 서양 화풍의 잔재를 담고 있었다. 어두운 전쟁 폐허와 이념 대립의 시대에 그는 평온한 전통 공간을 그리면서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너머 사회의 깊은 분열과 좌절을 체감해야 했다.

학살의 풍토 (제주)

1975년, 변시지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둔 채 ‘쫓겨나듯’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그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국가 권력의 폭력적 학살의 기억과 마주했다. 친지들과 이웃의 희생 소식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제주일보 해설에 따르면, 변시지는 제주의 황토빛 화면에 “4·3으로 핏줄을 잃은 자의 슬픔과 제주인들의 근원적인 비애”를 담아냈다. 곧이어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배경을 넘어, 진실이 은폐되고 죽음마저 침묵된 ‘강제된 침묵의 풍토’로 그의 그림 속에 체화되었다.

이렇게 제국주의, 분단, 학살이라는 삼중의 폭력적 풍토를 통과한 변시지의 예술은, 그 다층적 트라우마를 증언하고 치유하려는 실존적 응답이었다.

2부: 두 개의 형식, 두 개의 응답

극한의 풍토 속에서 베이컨과 변시지는 각기 다른 형식 전략으로 실존의 의미를 탐색했다.

2.1 프랜시스 베이컨: 폭력이 새긴 육체의 비명

베이컨의 캔버스는 관람자에게 불안을 안긴다. 그의 인물들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살갗은 늘어지고 해체된 듯 뒤틀린다. DailyArt가 지적했듯, 베이컨의 트라우마는 “어둡고 왜곡된 형상들로 가득한 섬뜩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투명한 상자나 철창에 갇혀 있는데, 이는 마치 감옥이자 도살장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감금된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 아래 완전히 대상화된 상태를 드러낸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자의 시선에 포박된 주체는 스스로의 자유가 제한된 채 객체로 나타난다. 베이컨은 전통적 재현을 배제하고 “신경계 전체를 캔버스에 옮기려”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겪은 폭력과 불안을 육체에 아로새기고, 이를 통해 관람자가 직접 고통을 체감하도록 하는 폭로와 증언의 미학을 택했다. 그의 그림에서 비명 짖는 머리와 찢겨진 신체는, 전후 유럽이라는 풍토가 새긴 잔혹한 흔적을 상징한다.

2.2 변시지: 삼중 풍토를 통과한 예술적 변모

변시지는 베이컨과는 반대로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본·서울·제주를 거치며 전수받은 요소들을 융합하고, 폭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원형을 모색했다.

일본 (습득)

변시지는 일본 유학 시절 서양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철저히 습득했다. 특히 데라우치 만지로 문하에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기법을 연마했고, 1948년 광풍회전에서 네 점의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엄격한 훈련은 훗날 형식 해체와 재구성의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서울 (재발견)

귀국 후 서울에서는 창덕궁 후원 풍경을 그리며 한국적 전통과 동양적 감수성을 재발견했다. 그는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옮겨가며 빼곡한 기와지붕과 전통 건축에 한국의 미학을 담았다. 서양 기법(일본 유학)과 동양 정신(서울의 역사적 공간)이 충돌하고 충돌하면서, 새로운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 (통합과 승화)

1975년 제주에 정착하면서 예술적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다. 그는 제주의 폭풍과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랑말, 까마귀, 초가집, 돌담과 같은 구체적 소재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제주 돌담은 ‘파도와 비, 햇빛과 짠내를 똑같이 견디며’ 쌓인 돌들의 연속으로, 그 위 까마귀들은 같은 바람을 맞으며 ‘이름 없는 평등’을 이룬다고 그는 기록했다. 초가집과 소나무는 풍토를 견디는 고독한 거처이자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풍부한 지역적 상징을 통해 변시지는 제주도의 거친 풍토와 사람들의 운명을 서사화했다.

변시지 예술의 형식적 완성은 제주의 독특한 상징들과 함께 “황색 바탕과 먹선”으로 구현되었다. 황색은 서양화의 전통적 캔버스 바탕이자 한국 전통의 황토색(대지의 색)이며, 모든 이념적 대립을 초월한 생명의 공간을 의미한다. 먹선은 동양 수묵화·서예의 핵심 기법이지만, 변시지는 이를 서양적 공간 구성과 결합했다. 그의 선은 단순한 윤곽이 아니라 대상의 기(氣)와 리듬을 담는 생동적 움직임이다. 실제로 변시지는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세계가 온통 아열대 태양 아래 노랗게 보였다”고 회고하며, 황토색을 고유색으로 삼았다. 그는 “천지현황(天地玄璜): 玄은 하늘의 색, 黃은 땅의 색”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색채 선택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를 시각화하려는 시도였다. 평론가들이 ‘평등원’이라 부른 그의 세계는, 베이컨의 격렬한 색채 충돌과 달리 황색과 흑색이 어우러져 일종의 일체감을 만든다. 이 형식적 조합은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치유와 재생을 향한 변시지의 실존적 선택이었다.

2.3 형식의 완성: 황색과 먹선, 동서양의 통합

변시지는 동·서양 기법의 변증법적 통합을 통해 자신만의 형식 언어를 구축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황토색을 “무한한 공간과 이야기, 꿈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보고, 제주 바다와 땅의 원초적 힘과 인간 의지를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 한편 검은 먹선은 동양인의 정신과 혼을 담아내는 가장 ‘동양적이고 편안한 색’으로 여겼다. 그는 형식적으로 서양화의 색채성에서 벗어나, 수묵화의 간결함과 동양적 미학을 결합했다. 실제로 변시지는 종착점에서 “천지현황(天地玄璜) – 검은 현(玄)은 하늘의 색, 누를 황(璜)은 땅의 색”이라는 색채론을 확립했다. 이러한 형식은 모든 사물을 하나의 색으로 통합하는 ‘무차별의 세계’, 즉 평등원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베이컨이 색채의 충돌로 불안과 긴장을 조성했다면, 변시지는 황색과 흑의 조화로 일체감을 만들며 포용과 치유의 미학을 선택했다.

3부: 자유의 한계와 가능성

3.1 극복의지: 상황을 초월하는 기투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란 제약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진 제약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식이 단순히 현재의 사실성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향해 ‘기투(project)’해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전후 유럽의 트라우마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왜곡된 육체 형상으로 능동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응답했다. 변시지에게도 삶 자체가 ‘극복 의지’였다. 그는 제국주의와 분단이라는 극한의 제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식민지 억압 아래 서양 화풍을 연마했고, 전쟁 폐허 속에서도 조용한 아름다움을 그렸으며, 4·3의 침묵 속에서 생명의 원형을 그려냈다. 제주의 강풍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소나무처럼, 그는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유연한 극복 의지를 보여주었다.

3.2 고독과 연대: 베이컨의 고립과 변시지의 연결

사르트르의 초기 사상은 ‘타인은 곧 지옥’이라는 경구로 대변되듯 개인의 고독을 강조했다. 베이컨의 예술 역시 이 고독한 개인을 그린다. 그의 인물들은 항상 혼자이며, 각자의 고통 속에 갇혀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연출한다. 변시지의 그림에도 고독은 등장하지만, 그 결은 베이컨과 다르다. 황량한 제주 들판에 외롭게 선 조랑말과 초가집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드러내지만, 이들은 대지에 발붙이고 바람을 맞으며 풍토의 일부로 이어져 있다. 가령 변시지는 돌담이 ‘수없이 쌓인 돌들’로 이루어져 서로 이어지듯, 개인의 영역을 나타내는 돌담이 연결돼 마을 공동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즉 그의 고독은 멀리 외면당한 고립이 아니라, 대지와 바람과 더불어 존재하는 ‘연결된 고독’이다. 변시지는 개인의 고독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 회복을 지향한다. 이는 사르트르 후기의 사유처럼, 개인과 집단의 긴장적 관계를 함께 시각화하는 것이다.

3.3 지역성에서 보편으로: 특수성의 승화

변시지 예술의 위대한 성취는 『지역성의 보편화』이다. 제주도 조랑말이나 돌담 같은 소재는 가장 특수한 지역적 이미지다. 그러나 변시지는 이 특수성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다다랐다. 사르트르도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변시지의 그림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척박한 바람을 견디는 제주 조랑말은 ‘모든 생명이 맞서는 시련에서의 인내’를, 거센 제주 폭풍은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고난’을 상징한다. 앞서 인용했듯 그의 황토빛에는 4·3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과 제주인의 운명이 녹아 있다. 변시지는 제주의 특수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심화함으로써, 오히려 모두에게 공명하는 예술 언어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서양 기법을 아우르는 형식 언어, 즉 황색 바탕과 먹선을 통해 지역적 이야기를 세계적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결론: 풍토 위에 선 자유

이 글은 변시지, 베이컨, 사르트르라는 세 인물이 ‘풍토’와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교차적으로 다루었는지 살폈다. 삼중의 폭력이 남긴 전후의 폐허라는 공통 풍토 앞에서 사르트르는 사유로 응답했고, 베이컨과 변시지는 각기 다른 형식으로 응답했다. 풍토는 우리를 규정하지만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 베이컨은 유럽의 트라우마를 육체의 비명으로 증언했다. 변시지는 제국주의·전쟁·학살이라는 ‘삼중의 풍토’를 지나며, 고통을 재현하기보다 극복 의지와 생명의 재생을 선택했다. 그의 예술은 자유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보여준다. 첫째, 황색과 먹선이라는 통합된 색채 체계를 통해 동·서 이분법을 넘는 제3의 길을 열었다. 둘째, 철저한 지역성 파고들기를 통해 특수한 경험이 보편적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기후 위기와 디지털 소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풍토와 마주한다. 이런 압도적 상황 앞에서 변시지의 예술은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진다. 베이컨의 그림처럼 절망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변시지의 조랑말처럼 뿌리 깊은 땅 위에 서서 폭풍을 견디며 극복할 것인가.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답하자면, 인간은 풍토 위에, 역사 속에, 육체 안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조건들을 넘어서는 움직임, 즉 자유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변시지의 예술은 풍토에 뿌리박은 채 이를 초월하려는 이 위대한 실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