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토의 지도- 변시지와 K-모더니즘의 잃어버린 원류

 

— 열 개의 시선으로 그리는 하나의 풍경

 

서(序) — 지도 밖의 화가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 지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1950년대 앵포르멜의 충격에서 1970년대 단색화의 성취까지, 그 계보는 서울에서 전개되었고, 서울의 화단이 평가했으며, 서울의 미술관이 기록했다. 이 지도에 변시지는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스스로 그 지도에서 걸어나왔다. 서울 화단에서 일정한 위치를 가졌던 비원 시절을 버리고 1975년 제주로 내려간 순간, 그는 공식 서사에서 사라졌다. 서귀포의 아틀리에에서 혼자 황토빛 캔버스를 마주한 40년—그 시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에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지도가 그리지 못한 영토가 있다면, 잘못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지도다. 이 글은 그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한 시도다. 변시지라는 한 화가를 통해, 서울 중심의 한국 모더니즘 서사가 놓친 것을 복원하려는 시도. 그를 위해 열 개의 시선이 필요했다. 식민지 교육의 역설, 귀향의 윤리, 침묵의 증언, 풍경의 정치성, 그리고 고갱·키퍼·카푸어·골즈워디와의 국제적 대화—이 시선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하나의 풍경이 떠오른다. 풍토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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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적의 문법으로 쓴 시

"나는 적의 문법으로 시를 썼다. 그 문법이 나를 배반하기 전에, 나는 그것을 배반했다."

— 에메 세제르

1931년, 여섯 살의 변시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사카로 건너갔다. 선택하는 나이가 아니라 따라가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 따라감이 이후 예술 전체를 결정했다. 그는 일본어로 그림을 배웠다. 일본의 눈으로 서양화를 보았고, 일본의 손으로 유화를 익혔으며, 일본의 미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받았다. 1945년 해방의 해에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했을 때, 해방은 왔지만 그가 그림을 배운 언어는 바뀌지 않았다.

도쿄에서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에 든 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었다. 데라우치는 일본 서양화의 거장 구로다 세이키의 제자였고, 구로다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일본에 이식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조선인 청년에게로 이어지는 계보의 가장 외곽에 변시지가 서게 된다. 그리고 1948년, 광풍회전 최고상. 100여 년 역사상 최연소, 조선인 최초. 한쪽에서 보면 이것은 동화의 성공이다. 식민지 출신의 청년이 제국의 기준으로 최고를 인정받은 것. 그러나 다른 쪽에서 보면 이것은 잠입이다. 제국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제국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 그 내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지 않은 것.

식민지 예술교육의 진정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억압자의 언어가 그 억압을 해체하는 도구로 전용되는 구조. 변시지는 유화라는 서양 매체를 익혔지만, 그 매체의 가장 서양적인 특성—기름기 있는 광택, 두터운 마티에르—을 제거했다. 유화 물감에서 기름기를 뺀다는 것은 서양화에서 서양을 빼는 것이다. 남은 것은 장판지의 질감, 황토의 따뜻함, 갈필이 만드는 동양 서예의 호흡이었다. 그는 서양의 매체를 가져다가 그 안에 한국의 살갗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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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떠남과 돌아옴

"나는 유럽의 문명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야생의 것만을 그리고 싶었다."

— 폴 고갱, 타히티에서 보낸 편지

1891년 고갱은 파리를 떠나 타히티로 갔다. 1975년 변시지는 서울을 떠나 제주로 돌아왔다. 표면적으로 닮아 있다. 문명의 중심을 버리고 주변부의 자연으로 들어간 것. 그러나 이 두 이동의 방향은 존재론적으로 정반대다. 고갱은 떠났다. 변시지는 돌아왔다.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다. 돌아오는 자는 익숙한 곳에서 자신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것은 타히티가 아니었다. 유럽 문명에 지친 한 프랑스 화가가 상상한 '원시'였다. 타히티 여성들의 풍만한 몸, 이국적 색채, 문명 이전의 순수함—이 모든 것은 고갱의 눈을 통해 재구성된 환상이었다. 실제 타히티인들의 삶, 이미 겪고 있던 식민지배의 현실은 고갱의 캔버스에서 지워졌다. 고갱에게 타히티인들은 주체가 아니라 소재였다. 미적 착취.

변시지는 제주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다. 그는 제주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제주 속에서 자신을 그렸다. 풍경과 화가가 분리되지 않는다. 고갱의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했다면, 변시지의 시선은 내부에서 더 깊은 내부로 향했다. 타자의 땅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그 땅이 자신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고갱이 찾은 것은 원시(原始)—역사 밖의 순수한 야생이었다. 변시지가 찾은 것은 근원(根源)—자신을 만든 세계의 가장 깊은 층위, 4·3의 상처를 기억하고 바람과 가난의 역사를 통과해온 구체적인 땅이었다.

고갱의 이동은 도피였다. 변시지의 이동은 책임의 수락이었다. 서울에서의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낯설어진 고향의 가난 속으로 돌아온 것. 귀향의 윤리. 떠나지 않는 용기. 이 차이가 두 화가의 예술적 성격 전체를 갈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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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부재의 증언

"섬은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 섬은 그저 거기에 있다."

— 모리스 블랑쇼

1948년 봄, 변시지는 도쿄에 있었다. 광풍회전 출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봄, 그의 고향 제주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4월 3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학살은 6년간 이어지며 섬 인구의 10분의 1을 지웠다. 변시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여섯 살에 떠났으니, 제주는 그에게 몸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부재의 장소였다. 일본 화단의 최연소 스타가 된 바로 그 봄, 고향은 불타고 있었다. 이것을 비난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재는, 이후 삶 전체를 통해 하나의 무게로 변환된다.

1975년 귀향 이후, 변시지는 4·3을 소재로 한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피를 그리지 않았고, 시신을 그리지 않았으며, 학살을 고발하는 도상을 만들지 않았다. 이 침묵은 복합적이다. 첫째, 독재 하에서 4·3을 그린다는 것은 위험했다. 둘째, 변시지 자신의 말처럼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속 저항'이었다. 4·3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그 총량의 고통을 폭풍의 형식 속에 압축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읽기가 있다. 그는 경험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없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린다는 것은 증언이 아니라 오염일 수 있다. 부재했던 자의 윤리는 때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지 않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웅크린 사내는 왜 웅크리고 있는가. 검은 까마귀떼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폭풍 속에 혼자 서 있는 사내의 등은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4·3을 아는 눈으로 그의 그림을 보면, 화면들이 전혀 다르게 읽힌다. 4·3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로, 4·3 이후의 세계를—살아남은 자들의 몸과 풍경을—계속 그렸다는 것. 부재의 증언.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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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검열이 닿지 못하는 언어

"억압받는 자들은 두 가지 언어를 가진다.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때로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한다."

— 자크 랑시에르

풍경화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장르처럼 보인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돌담은 이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음'이 이미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1975년 유신 체제 하에서 제주의 바람을 그린다는 것—폭풍을 그리고, 웅크린 사내를 그리고, 황토빛 하늘 아래 구부러진 소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었다. 검열이 도달할 수 없는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었다.

검열은 명시적인 것을 겨냥한다. 이름이 있는 것, 주장이 있는 것, 고발이 있는 것을 찾아내어 제거한다. 그러나 황토빛 하늘 아래 구부러진 소나무를 금지할 근거는 없다. 변시지의 풍경은 검열의 구조적 맹점을 통과한다. 그의 폭풍은 실재하는 자연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억압의 형상화다. 두 층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 있다. 웅크린 사내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많은 섬에서 평생을 산 몸이 자연스럽게 익히는 자세이면서, 동시에 4·3을 살아남은 자의 자세다. 자연적인 자세와 역사적인 자세가 같은 몸 안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풍경화의 역설적 힘이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금지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주장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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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상처 입은 땅을 그리는 세 가지 방식

"독일의 역사는 재가 되었다. 나는 그 재 위에 선다."

— 안셀름 키퍼

안셀름 키퍼의 재료는 납이다. 무겁고, 독성이 있으며, 빛을 흡수한다. 죽음의 재료이자 봉인의 재료. 불탄 밀밭, 납으로 만든 날개, 재가 된 책들—키퍼의 캔버스는 독일 역사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때로는 잔혹하리만큼 명시적으로 담는다. 변시지의 재료는 황토다. 씨앗을 키우는 흙이고, 집을 짓는 재료이며,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는 땅. 키퍼가 역사의 무게를 직접 들어올린다면, 변시지는 역사의 무게를 땅속에 스며들게 한다. 키퍼는 상처를 드러내고, 변시지는 상처를 품는다. 납과 황토—이 두 재료의 차이가 두 화가의 역사 인식을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두 방식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 상처 입은 땅을 버리지 않는 것. 키퍼는 독일을 떠나지 않았고, 변시지는 제주를 다시 선택했다. 상처 입은 땅을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땅 자체가 되는 것. 상처 입은 땅은 말할 수 있다. 말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아니시 카푸어는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서양 현대미술의 언어—설치, 개념, 추상—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힌두교적 공(空)의 개념을 그 안에 녹여넣었다. 비서구의 근원을 서양의 형식으로 번역하여 세계 미술의 중심에 선 것이다. 변시지는 반대로 움직였다. 서양 유화의 언어를 익혔지만, 그것을 세계의 중심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그 언어를 들고 주변부로 돌아갔다. 카푸어가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향했다면, 변시지는 중심에서 근원으로 향했다. 카푸어의 공이 비움을 통해 무한을 지향한다면, 변시지의 황토는 채움을 통해 근원을 지향한다. 비서구 모더니즘은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이 두 방향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지도가 그려진다.

앤디 골즈워디와의 비교는 장소에 대한 관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골즈워디는 전 세계의 장소에서 작업한다. 그 장소의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사진으로 기록한 뒤 떠난다. 낙엽 구조물, 얼음 탑, 돌 아치—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작품의 소멸 자체가 작품의 일부다. 변시지는 한 장소에서만 작업했다. 같은 바다, 같은 바람, 같은 돌담을 40년간 반복해서 그렸다. 골즈워디의 '장소 특정 예술(site-specific art)'이 장소와의 일시적 대화라면, 변시지의 제주화는 장소와의 전생애적 귀속이다. 골즈워디는 장소 속에 있다. 변시지는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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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에콜 드 서귀포

"파리는 중심이 아니었다. 파리는 주변부들이 모여 중심을 만든 곳이었다."

— 게르트루드 스타인

20세기 초 파리에는 세계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샤갈은 러시아에서,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수틴은 리투아니아에서,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몽파르나스의 싸구려 아틀리에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 이 사람들을 묶는 이름이 에콜 드 파리였다. 역설적이게도, 세계 미술의 중심이라 불린 파리는 사실 주변부 출신들이 만든 것이었다.

서귀포는 파리의 반대편이다. 화랑도 비평가도 컬렉터도 없는 소도시. 에콜 드 파리가 집단이었다면, 에콜 드 서귀포는 독방이었다. 한 화가, 한 아틀리에, 한 장소.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와 까마귀 소리 속에서 혼자 캔버스를 마주하는 시간. 변시지의 대화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었고, 파도였으며, 돌담이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풍토의 언어와 40년간 대화했다. 이 고독이 그의 예술의 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세계가 서귀포를 향해 왔다. 2007년, 스미소니언이 변시지의 작품을 10년 상설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의 중심으로 가지 않았지만, 세계의 중심이 찾아왔다.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그 주변부가 결국 중심이 되었다.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 되는 역설—서귀포라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가 인류 보편의 감정에 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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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이름을 붙이는 자

"나는 제주화를 그린다."

— 변시지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장르 이름을 붙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비평가가 조롱으로 붙인 것이 굳어진 것이고, 단색화라는 이름도 비평적 언어가 사후에 붙인 것이다. 변시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제주화(濟州畵)'라 불렀다. 비평가의 명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주화라는 이름은 소재의 이름이 아니다. 형식의 선언이다. 제주의 풍토가 자신의 예술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 자체를 결정한다는 것. 황토색, 검은 선, 갈필, 단순화된 형태—이 모든 형식적 선택이 제주라는 장소에서 나왔다는 선언. 동시에 자율성의 선언이기도 하다. 한국화도 아니고 서양화도 아니며 일본화도 아닌, 제주라는 특수한 풍토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고유한 형식.

이름이 붙기 이전과 이후, 그림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이 무엇인지가 달라졌다. 이름 이전의 그림들은 제주를 소재로 한 유화였고, 이름 이후의 그림들은 제주화였다. 소재를 담은 그릇에서 장르 자체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시지 이후에 제주를 그리는 화가는 선택해야 한다. 제주화를 계승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변형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제주화라는 이름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하나의 이름이 만드는 예술사적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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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結) — 풍토 모더니즘이라는 원류

이제 다시 처음의 지도로 돌아간다.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 지도에서 변시지가 빠져 있었다면, 그것은 변시지의 부재가 아니라 지도의 결핍이다. 이 글이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결핍된 좌표다.

서양 모더니즘에도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도시의 모더니즘—파리, 뉴욕, 베를린의 속도와 파편화. 장소의 모더니즘—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한 장소를 반복해서 파고들며 그 장소에서 모더니즘의 언어를 발견한 것. 한국 모더니즘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모더니즘이 있었고, 변시지의 제주화가 보여주는 장소의 모더니즘이 있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개념이 필요하다. 풍토 모더니즘(風土 Modernism). 서양 모더니즘의 형식적 언어—추상, 단순화, 본질의 추구—를 수용하되, 그 언어를 특정 풍토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경로. 변시지의 제주화가 이 개념의 가장 선명한 실례다. 그는 서양 유화의 언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언어를 제주의 풍토 속에서 변형시켰다. 황토색은 서양 인상주의의 색채가 제주의 태양 아래서 변형된 것이고, 갈필의 선은 서양 데생의 문법이 동양 서예의 필법과 제주의 바람 앞에서 변형된 것이다.

단색화와 제주화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전개되었지만, 방향이 달랐다. 단색화가 물질과 행위의 순수성을 추구했다면, 제주화는 풍토와 장소의 구체성을 추구했다. 단색화는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모더니즘의 전부는 아니다. 두 방향이 함께 있을 때 한국 모더니즘은 더 온전해진다.

변시지의 탄생 100주년인 2026년, 이 재조명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한 화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모더니즘의 공식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 서울 중심의 서사에 제주의 풍토를 더하는 것. K-모더니즘의 계보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었던 원류를 복원하는 것.

근대는 서울에서만 오지 않았다. 제주의 황토빛 풍토에서도, 바람과 돌담과 까마귀 속에서도, 40년간 같은 장소를 파고든 한 화가의 캔버스 위에서도 왔다. 그 캔버스 앞에서 그는 혼자였지만, 그의 그림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풍토가 함께 그렸다. 바람이 함께 그렸다. 제주라는 이름의 세계 전체가, 그의 붓끝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