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를 다룬 또는 변시지에게서 영감을 받은 문학작품 목록
- 《변시지: 폭풍의 화가》 – 서종택 (열화당 초판 2000년, 개정판 2017년, 평전/전기문학)
- 내용 요약: 제주 출신 서양화가 변시지의 일생과 예술세계를 다룬 작가 평전이다. 어린 시절 제주 자연과 일본 유학 시절, 광풍회전 최고상 수상 등 화가로서의 여정부터 말년 제주 귀향까지를 촘촘히 그렸다. 책은 변시지의 그림 속 풍경(황톳빛 땅, 거센 바람, 외로운 사내 등)에 깃든 비애와 고독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그의 삶과 예술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 변시지와의 연관성: 변시지 본인의 생애를 소재로 한 공식 평전으로, 화가의 예술 철학과 미학을 깊이 있게 해설한다. 저자 서종택은 제주-오사카-서울-제주로 이어지는 변시지의 귀향과 예술적 순례 과정을 추적하여, 전통과 현대, 지역성과 세계성이 교차하는 그의 예술세계를 분석한다. 예를 들어 변시지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까마귀, 바람, 초가집, 조랑말 등의 상징이 화가 자신의 운명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 문학적 특징/감상 포인트: 학술적 평전이면서도 문학적 필치가 살아있다. 황토색과 먹색으로 대자연의 율동을 그려낸 그림들을 언어로 옮기며, 시적인 이미지와 미학적 통찰을 결합했다.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나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라는 결론처럼, 변시지의 예술혼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대목들이 인상적이다. (초판 출간 당시 제목은 **《변시지: 폭풍의 화가》**로 2000년에 간행되었으며, 이후 내용 보완과 작품 이미지 교체를 거쳐 2017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 《난무: 폭풍의 화가 변시지》 – 김호경·김미숙 공저 (2019년, 전기소설)
- 내용 요약: 변시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설화한 장편 전기소설이다.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변시지가 식민지 조선인 화가로서 겪은 온갖 시련과 영광, 그리고 귀국 후 제주 자연을 배경으로 독자적 화풍(일명 ‘제주화’)을 완성하기까지의 내면 세계를 극적으로 그려냈다. 예컨대 학교 씨름 대회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평생 저는 장애를 안게 된 일, 일본 미술계에서 조선인 최초로 최고상을 수상하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에 부딪힌 일, 귀국 후에는 분단 시대의 혼란과 실명 위기까지 겪는 모습 등이 펼쳐진다.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우며 황토색 폭풍의 바다를 그려낸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로 묘사된다.
- 변시지와의 연관성: 제목 ‘난무’는 변시지의 대표작 <난무>(폭풍 속 춤추는 파도 그림)을 가리키며, 소설은 변시지 화백 본인의 생애를 줄거리로 삼고 있다. 실제 존재 인물들의 대화와 에피소드가 소설적으로 재구성되었고, 변시지의 예술 철학(“미술은 시각적인 것이고,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나 제주 풍토에 대한 애정이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특히 제주 자연(태풍 몰아치는 바다, 검은 현무암 해안 등)이 주인공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그려져, 그의 대표작들이 탄생한 배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 문학적 특징/감상 포인트: 두 명의 작가가 공저한 만큼 취재 기반의 사실성과 문학적 상상력이 조화를 이룬다. 시대극 소설의 형태로, 변시지의 일대기를 읽는 재미와 더불어 예술가의 고뇌를 심리적으로 파고드는 서사가 돋보인다. 문장도 역동적이며 감정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주인공이 평생 “폭풍 같은 에너지”를 좇아 거친 삶을 살았다는 설정과 맞물려 독자에게 큰 감동을 준다. 변시지의 실제 명언이나 화폭에 대한 묘사가 간간이 인용되어 현실감을 높이고, 예술가 소설로서의 몰입도를 높이는 점도 감상 포인트이다.
- 《변시지, 바람이 전하는 말》 – 황인선 글, 변시지 그림 (2022년, 오브제텔링 픽처북)
- 내용 요약: 변시지의 회화 작품에 문학적 상상력을 입힌 신개념 픽처북이다. 화가의 생애 전반에 걸친 명작 80여 점을 선별하여, 그 그림 속에 등장하는"주요 오브제(대상)"들을 의인화한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 변시지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 바람, 외로운 사내(화가 자신), 어린 해녀, 이어도와 뱃길 등이 화자가 되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독자는 각 작품 속 사물의 목소리를 통해, 폭풍을 닮은 그의 그림들이 품은 외로움과 기다림, 희망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제주 신화와 자연풍광도 이야기 안에 녹아 있어 한편의 서정적 동화 혹은 시를 읽는 느낌을 준다.
- 변시지와의 연관성: 이 책은 변시지 그림 그 자체를 텍스트 삼아 창작된 문학작품이다. 화가의 실제 작품 세계를 문학적 모티프로 삼았다는 점에서, 변시지 미학에 대한 경의와 오마주라 할 수 있다. 각 장마다 대응되는 그림이 실려 있고, 해당 그림이 갖는 상징 – 예컨대 영원한 동반자처럼 그림 속 화가 곁을 지키는 까마귀(변시지 자신의 분신), 혹은 전설의 섬 이어도 등 – 을 통해 화가가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결국 책 제목처럼 “바람이 전하는 말”은 곧 변시지 예술이 전하는 말이다.
- 문학적 특징/감상 포인트: 오브제텔링이라는 독특한 기법이 돋보인다. 이는 그림 속 사물에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독자는 마치 그림과 대화하듯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림과 글이 긴밀히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미술 감상과 문학 읽기의 융합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 화집이 아니라 창의적 스토리텔링 아트북으로서, 예술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받는다. 변시지의 황갈색 폭풍 풍경을 배경으로 의인화된 존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의 작품이 지닌 철학적 여운을 독자들이 더욱 친근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 《時志, 시대의 빛과 바람에 뜻을 새기다》 – 문상금 (2023년, 시집/시화집)
- 내용 요약: 제주 출신 문상금 시인이 변시지 화백의 타계 10주기를 추모하여 펴낸 시집이다. 변시지의 그림 45점에 각각 대응하는 총 45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실었고, 시의 정서에 맞춰 해당 그림들도 함께 배치된 시화집 형태다. 1부 〈사내는 까마귀에게 묻는다〉, 2부 〈목숨같은 점 하나〉, 3부 〈천 개의 붓 끝에 이는 바람〉, 4부 〈다들 집으로 간다〉 등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화가의 작품 모티프인 외로운 사내와 까마귀, 원초적 바람, 점과 빛 등의 이미지가 시어(詩語)로 승화되어 있다. 각 작품을 감상하며 떠오른 화두를 시인은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폭풍 같은 격정으로 노래한다.
- 변시지와의 연관성: 변시지의 예술세계에 직접 영감을 받아 창작된 순수시 모음이다. 특히 시인은 생전에 변시지 화백과 인연이 있었고, 그의 화실을 찾아가 황토빛 회오리 같은 그림에 매료되었던 개인적 체험까지 바탕에 두고 있다. 그만큼 변시지의 상징물들이 시 곳곳에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변시지 스스로를 은유하는 “한 다리로 절룩이는 까마귀”의 이미지가 반복되어, 예술가의 고독과 혼을 대변한다. 이처럼 그림 속 소재를 통해 화가의 영혼과 시대정신을 시로 형상화한 점에서 변시지에 대한 문학적 헌사라 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의 ‘時志’ 역시 화가의 이름(時志)을 빌려와 시대정신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 문학적 특징/감상 포인트: 시와 그림의 교감이 돋보이는 예술 시집이다. 한 편 한 편의 시는 대응되는 그림의 색채와 분위기를 언어로 포착해내어, 마치 그림에 달린 시적인 캡션처럼 읽힌다. 그러나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폭풍과 빛과 바람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 존재와 예술 혼을 성찰하는 깊이를 갖추고 있어 감동을 준다. 문상금 시인은 변시지 작품을 보고 느낀 바를 오랫동안 “한 편 두 편 써두었다”고 밝히는데, 이러한 경건한 헌정시들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독자는 이 시집을 통해 “세상의 모든 폭풍들이 뚫고 지나갈 바람의 통로를 화폭에 그려낸” 화가의 정신세계와 마주하면서, 시인이 빚어낸 언어의 잔잔한 위로와 울림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출판 정보
- 저자: 변시지
- 장르: 예술수필·미학노트
- 집필 시기: 1970~1990년대에 걸쳐 메모·원고로 작성, 사후에 유족과 재단이 정리
- 출판: 열화당 (정식 단행본 여부는 시기마다 다름, 일부는 전시도록·재단 자료집에 수록)
- 분량: 총 35개의 주제별 노트 형식 (예: 고갱의 선, 색채의 혼합, 빛과 그림자, 예술과 비예술 등)
- 작품 개요 및 주요 내용
- 변시지가 생전 직접 기록한 예술·미학적 단상들을 묶은 노트.
- 주제는 서양미술사(들라크루아, 고갱, 입체파, 마티스 등), 동양미학(노자, 풍토론), 색채와 선, 빛과 그림자, 표현매체의 본질, 예술과 비예술 등으로 폭넓다.
- 내용은 개념 정의 → 작가·사조 분석 → 자신의 견해 순으로 전개되며, 마지막에는 종종 자신의 그림과 ‘제주’라는 풍토를 연결하는 결론을 내린다.
- 예를 들어 ‘빛과 그림자’ 장에서는 인상파의 빛 개념과 동양화의 여백미를 비교하고, 제주 바람과 빛의 색감을 본인의 채색법과 연결한다.
- 문학적 형식과 구성
- 산문과 단문 메모가 혼합된 형식.
- 학술논문처럼 체계적이진 않지만, 각 장이 독립된 미학 에세이로 읽힌다.
- 예술철학서·미술평론의 어조와, 작가수필의 감성이 공존한다.
- 문장은 간결하고 명료하며, 시적인 은유보다는 분석과 비유를 통한 논증이 많다.
- 변시지와의 관계
- 변시지 본인의 사유를 담은 직접 발화 자료.
- 작품의 형식적 특징(황토색, 강한 바람 묘사, 거친 붓질)이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풍토론(風土論)"의 연장선임을 밝힌다.
- ‘제주화(濟州畵)’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
- 예술가로서의 자전적 고백도 간간이 스며 있어, 그의 인생 여정과 철학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 시적·미학적 특징
- 서양·동양의 미학을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설정.
- ‘풍토’라는 키워드로 자연환경이 예술 형식과 색채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탐구.
- 단순한 미술사 해설이 아니라, 개인 창작론과 직결된 철학적 글쓰기.
- 예: “서양의 기하학적 원근은 인간의 시각을 지배하지만, 동양의 산수는 인간을 풍경 속에 놓아준다.”
- 색채에 대해서는 “색은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그 속을 흐르는 바람과 빛의 기운”이라고 정의.
- 감상 포인트 및 예술·문학적 의의
- 변시지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 텍스트.
- 제주 바람·빛·토양이 그의 색채와 구도를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직접 증언.
-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의 그림에서 왜 황토색과 검은 선, 비스듬히 휘는 구도가 반복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 또한 변시지가 ‘지역성과 보편성’을 어떻게 통합했는지, 서양 모더니즘과 한국적 미학의 교차점을 어떻게 찾았는지 엿볼 수 있다.
- 비평 및 평가
- 미술평론가들은 『예술과 풍토』를 두고 “변시지 예술의 철학적 설계도”라고 평가.
- 일부 평론은 이를 ‘화가의 자서전이자 선언문’으로 보고, 회화작품과 병행해 읽을 것을 권한다.
- 특히 현대 한국미술에서 ‘풍토’ 개념을 체계적으로 미학에 끌어들인 드문 사례로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일본 유학 시절의 문학적 환경 (1940년대 배경)
변시지(邊時志, 1926~2013)는 1940년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로 건너가 프랑스어 학원인 아테네 프랑세즈(Athénée Français)에 입학하는 등 서양 문화에도 관심을 두었습니다[1]. 그는 후일 젊은 시절 소설가를 꿈꾸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 화단에서 서양화 기법을 수학했지만, 한편으로는 전후(戰後) 혼란기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문학 작품과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동경 시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탐독했다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예술계와 학계의 풍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930~40년대 도쿄의 학생과 예술가들은 서구 근대문학과 일본 현대문학을 함께 접하며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변시지 역시 이러한 지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 일본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프랑스, 영미 문학 작품을 일본어 번역본이나 원서로 널리 읽었습니다. 특히 자연주의와 모더니즘 문학이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의 젊은 예술가들은 서구 리얼리즘의 거장들과 근대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사상의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2][3]. 실제로 1900년대 초 일본 문단은 서구 자연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고, 다이쇼~쇼와 초기 세대 작가들은 에밀 졸라(Zola), 기 드 모파상(Maupassant) 등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4][5]. 이러한 흐름은 1940년대까지 이어져, 전쟁 전후의 일본 학생들도 도스토옙스키나 헤밍웨이 같은 서구 작가들에 심취하거나,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등의 자국 문학을 통해 시대정신을 고민했습니다. 변시지 또한 일본 유학 시절 이러한 문예 풍토 속에서 동서양의 문학과 예술 담론을 두루 접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시지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요 문학 작가들
당시 변시지가 직접 읽고 영향을 받았을 법한 작가들을 몇 명 꼽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1940년대 일본 예술학도들 사이에 화제였던 서구의 근대문학 작가들과, 그 시기 두드러졌던 일본 문학 거장들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ᄋ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 – 미국의 현대소설가로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유명합니다. 헤밍웨이는 군더더기 없이 사실을 적시하면서도 행간의 의미로 깊은 정서를 전달하는 ‘아이스버그 이론’의 글쓰기를 선보였는데[6], 이러한 간결한 표현과 감정의 절제는 변시지의 검소한 필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헤밍웨이의 작품에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고독하게 운명을 마주하는 주제가 자주 등장하는데, 노인과 바다에 그려진 바다와 인간의 대결 같은 장면은 변시지 그림에 담긴 풍랑과 인물의 모티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7]. 실제로 비평가들은 변시지의 황갈색 폭풍 속 제주바다 풍경을 두고 “인간과 자연의 끝없는 싸움을 그린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와도 견줄 만하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7]. 헤밍웨이의 냉철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강인함을 그리는 태도는 변시지의 과장 없이 담담한 화풍과 고독한 주제 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ᄋ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1850~1893) – 프랑스의 단편소설 거장이자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입니다. 모파상은 전쟁, 광기, 삶의 비애 등을 소재로 한 수백 편의 단편을 통해 인간 현실을 냉혹하게 묘사했으며, 짧은 분량 안에 삶의 아이러니와 비극을 담아내는 데 탁월했습니다[8]. 그의 작품들에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 가난과 욕망, 정신적 불안 등의 주제가 반복되는데, 이러한 사회의 어둡고 처절한 단면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모파상의 기법을 적극 모방했고, 조선인 유학생 작가들 역시 모파상의 사실주의를 교본처럼 여겼습니다[9][10]. 변시지가 젊은 시절 접했을 서구 문학 중에서도 모파상의 이야기는 현실의 냉혹함과 인간 고통의 보편성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며, 이는 훗날 그가 제주의 민중 삶과 섬 풍광을 담담히 그려내는 데 있어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파상의 냉철한 현실 인식과 페이소스는 변시지 작품의 주제인 멜랑콜리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ᄋ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y, 1821~1881) – 러시아의 대문호로, 인간 내면의 심리와 영혼의 갈등을 깊이 탐구한 소설가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죄와 벌, 구원, 실존의 문제 등을 다루며 20세기 전세계 문학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시대 이후 그의 작품이 널리 읽혔고, 특히 1930~40년대 젊은 지식인들은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인간 존재의 고뇌와 구원에 대한 물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컨대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도스토옙스키를 문학적 스승 중 하나로 여겼는데,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함께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영향받았다”고 전해집니다[3]. 변시지 역시 일본 유학 시절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나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변시지에게 인간의 내면을 예술로 승화하는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특히 변시지 작품에 깃든 비애와 고독의 정서는 도스토옙스키식의 실존적 고뇌와 닮은 측면이 있는데, 이는 후술할 다자이 오사무의 영향과도 연결됩니다.
ᄋ 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1867~1916) –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작가”로 불리는 근대 일본 문학의 거장입니다[11]. 소세키는 인간의 고독과 심리를 깊이 있게 그려낸 소설들을 남겼는데, 대표작 『마음』에서는 메이지 말기 지식인의 외로운 내면과 죄책감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선생님’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정체 모를 고독 속에서 살아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로, 소세키는 이를 통해 근대화 속 개인의 고독과 윤리적 번뇌를 형상화했습니다[12]. 이러한 고독의 테마는 소세키 문학 전반에 흐르는 정조로서, 현대 독자들뿐만 아니라 전후 세대의 한국인 예술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일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변시지가 소세키의 작품을 접했다면, 급변하는 시대 속 개인의 소외와 우정, 배신, 양심의 가책 등을 담은 소세키의 이야기가 그의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변시지 본인도 일본 유학과 타향살이 속에 뿌리 잃은 삶의 외로움을 느꼈는데, 소세키 문학이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해주는 창(窓)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세키의 작품을 통해 배우는 인간 내면의 응시와 고독의 미학은 훗날 변시지가 제주 풍경의 쓸쓸함을 화폭에 담는 정신적 토양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ᄋ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1892~1927) – 다이쇼 시대의 단편문학의 대가로, 전통 설화에서 소재를 얻은 독특한 단편들과 자전적 작품을 남긴 작가입니다. 아쿠타가와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모와 환각, 불안, 윤리적 딜레마 등을 예리한 문체로 포착하여 일본 단편문학의 수준을 혁신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라쇼몽>, <지옥변> 등은 인간의 추악함과 예술가의 광기를 다루며, 후기 자전적 작품 <톱니바퀴>에서는 자신의 정신적 붕괴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1927년 그가 35세의 나이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은 일본 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세대 작가들에게 “천재 작가의 비극”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변시지가 유년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장하는 동안, 아쿠타가와의 이름과 작품들은 이미 교과서에도 실리며 널리 읽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 등 1930~40년대 청년 문인들은 아쿠타가와를 문학적 선배로 숭배했고, 그의 영향을 받아 허무와 불안을 문학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1] [17] [20] [22] [23] [26] [31] [32] 변시지 Byun, Shi-Ji
https://kapatv.net/%EC%9A%B0%EB%A6%AC%EC%8B%9C%EB%8C%80%EC%9D%98-%EC%9E%91%EA%B0%80/view/263406
[2] TURNING TO THE WEST (1901–1906) 4.1. Discovery of the Real ...
[3] [13] Osamu Dazai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Osamu_Dazai
[4] [5] A Short History of Japanese Literature, Part 6 | Japan Kaleidoskop
https://japankaleidoskop.wordpress.com/2013/07/31/a-short-history-of-japanese-literature-part-6/
[6] An Introduction to literary minimalism in the American short story | what we've got
[7] 아트제주 스페이스, '끝나지 않은 그리움' 변시지 개인전 개최 - 서울 ...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130
[8] Analysis of Guy de Maupassant’s Stories –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https://literariness.org/2019/12/05/analysis-of-guy-de-maupassants-stories/
[9] Global Impact of Japanese Literature | Intro to Modern ... - Fiveable
https://library.fiveable.me/introduction-to-modern-japanese-literature-and-culture/unit-14
[10] The French Influence in Modern Japanese Literature
https://bungeikan.japanpen.or.jp/international-3686/
[11] [12] [마음]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과 고독 | 예스24 채널예스 - 예스24 채널예스
https://m.ch.yes24.com/Article/Details/47023
[14] Osamu Dazai: The tragic genius of Japanese literature | Japan Experience
https://www.japan-experience.com/plan-your-trip/to-know/books-japan/osamu-dazai
[15] [16] [28] Dazai Osamu | Modernist, Novelist, Poet |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Dazai-Osamu
[18] [19] [30] 변시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B3%80%EC%8B%9C%EC%A7%80
[21] [24] [25] [27] [29] [35] ‘폭풍의 화가’ 변시지가 그린 황금빛 제주 향토 풍경 - 아트조선 - 아트뉴스 > Views
https://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23/04/04/2023040402114.html
[33] [34] 변시지(邊時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풍회(光風會)의 창립과 이념
광풍회는 1912년(메이지 45년)에 결성된 일본의 서양화 중심 미술단체로, 근대 일본 서양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했다[1]. 구로다의 외광파(外光派) 화풍, 즉 밝은 자연광을 담아낸 온건한 사실주의 전통을 계승한 단체로서 별도의 혁신적 강령을 내세우기보다 기존 관전 계열의 품격을 유지했다[2][3]. 초기 창립을 이끈 인물로는 나카자와 히로미쓰, 야마모토 모리노스케, 미야케 가쓰미, 스기우라 히스이 등 구로다 문하의 중견 서양화가들과 디자이너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같은 해 6월 도쿄 우에노에서 제1회 광풍회전을 개최했다[2][4]. 특별한 주의주장을 표방하지 않았던 광풍회는 구로다의 지지를 얻어 결성된 후 매년 공모전을 통한 전람회를 열었고, 인상주의 이후의 새로운 미술 조류 속에서도 비교적 절충적이고 아카데믹한 화풍을 유지하며 일본 화단의 주류로 부상했다[5][6]. 이러한 광풍회전은 젊은 화가들에게는 등용문이 되었고 중견 작가들에게는 작품을 발표하고 실험해볼 장으로 기능하면서, 근대 일본 미술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으로 평가된다[4][7]. 또한 1950년대에는 회관을 설립하고 법인화되는 등 조직을 갖추어, 일수회 등과 함께 전후에도 일본 일전(Nitten) 체제를 떠받치는 유력 단체로 이어져왔다[8]. 광풍회 공모전은 이후 매년 지속되어 2014년에 제100회를 맞이했고, 이를 기념한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했다[9].
♦ 주요 회원과 일본 미술계에서의 영향
광풍회는 서양화(유화)와 공예 부문을 아우르는 구성으로 시작하여, 시대에 따라 많은 작가들이 거쳐 간 일본 미술계의 중심 무대였다[10][2]. 창립 직후 고바야시 만고, 남궁조(南薫造), 아카마츠 린사쿠, 고지마 도라지로 등 당대 실력 있는 화가들이 회원으로 합류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 특히 광풍회는 관전(官展, 문부성 미술전람회와 그 후신인 제국미술원전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다수의 회원들이 분텐·테이텐(文展·帝展)의 수상자나 심사위원을 맡는 등 공모전 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했다[2][11]. 광풍회 회원들은 구로다 이래의 자연주의적 색채와 조형감각 위에 약간의 인상파적 기법을 도입한 스타일을 주로 추구하여, 전통과 현대성이 절충된 밝고 조화로운 화면을 집단적으로 선보였다[12]. 이러한 경향은 일찍이 일본 미술계의 안정적인 주류 양식으로 받아들여졌고, 광풍회는 전전(戰前)·전후를 통해 일본 근대 미술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1940년에는 일부 회원들이 중일전쟁의 현장을 그리기 위해 중국 대륙으로 파견되는 등 시대 상황에 협력하기도 했고, 전쟁 후에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대두로 회원들이 니카회, 신제작협회 등으로 이동하거나 분화하는 일도 있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풍회 자체는 21세기 현재까지 존속하며, 긴 역사를 통해 축적된 영향력으로 일본 미술 공모전 문화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광풍회가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몇 안 되는 미술 단체로서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방증한다.
♦ 식민지 시대 조선인 화가들의 참여
흥미로운 점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시기에 조선인 청년 화가들 상당수가 광풍회의 무대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5][14]. 광풍회는 한국에는 비교적 생소한 이름이지만, 해외(일본) 유학 중이던 조선 출신 작가들이 다수 작품을 출품했던 대표적 그룹이었다[1][5]. 실제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으로서 김환기(1913-1974), 김형근, 김종하, 김인승, 김원 등 여러 작가들이 광풍회전에 입선했고, 천재 화가로 칭해지는 이인성(1912-1950) 역시 광풍회 공모전에 출품해 특선을 수상한 바 있다[5][14]. 조선에서 최고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더불어, 일본 본토의 광풍회 공모전은 식민지 조선의 재능 있는 청년들에게 더 큰 무대를 제공했던 셈이다. 광풍회에서의 입상은 곧 일본 중앙 화단에서의 인정을 의미했기 때문에, 식민지 출신 화가들은 이 도전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지위를 높이고자 했다. 다만 당시 조선인 출품자들은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하고 문화적으로 동화 압력을 받는 등 어려움도 있었는데, 광풍회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경우였다. 이처럼 여러 한국인 화가들이 광풍회를 통해 일본 미술계와 교류하며 경력을 쌓은 사실은, 근대 동아시아 미술이 초국적 맥락에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광풍회는 제국 일본의 미술 플랫폼이었지만 조선인 화가들도 일정 역할을 함으로써, 미술을 통한 식민지-본국 간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변시지(1926-2013) 또한 광풍회를 무대로 두 문화권을 잇는 독자적인 경로를 걸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 변시지와 광풍회: 동경 유학 시절의 활동
변시지(邊時志)는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 화가로서, 어린 시절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여 성장했고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다[15]. 1945년 학교를 졸업할 즈음 일본 패전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변시지는 계속 도일하여 도쿄로 상경, 당대 저명한 서양화가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받았다[16][17]. 데라우치는 일본 제국미술원 회원이자 영향력 있는 화단 원로로, 유럽 아카데믹 사실주의에 약간의 인상주의 터치를 가미한 절충적 인상주의 화풍을 추구하던 인물이다[18]. 변시지는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 아래 뛰어난 인물화 기법과 사실적 표현력을 연마했고, 자연스럽게 일본 서양화단의 주류 경향에 매료되어 주로 인물화를 그리며 화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12]. 그의 재능은 곧 공식 무대에서 인정받았는데, 1947년 도쿄에서 열린 제33회 광풍회전에서 첫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에 성공하였고 동시에 같은 해 일본 문부성 주최 일본미술전람회(日展)에도 처음 입선하였다[19]. 특히 1948년 제34회 광풍회 공모전에서는 불과 23세의 약관에 최연소로 광풍회전 최고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다[19][20]. 이는 식민지 출신의 한국인이 일본의 최고 권위 공모전에서 얻은 사상 초유의 성과로, 당시 일본 화단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21][14]. 변시지는 이 때 <베레모를 쓴 여인>과 <만돌린을 가진 여자> 등 인물화 2점을 포함한 4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최고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24][20]. 광풍회전 수상으로 이 작품은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 광풍회 경험이 변시지 예술에 미친 영향
변시지가 광풍회에서 거둔 성공은 단순한 수상 경력 이상으로 그의 예술적 성장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광풍회 활동을 통해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서양화 기법과 평가 기준을 몸소 체득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데라우치 만지로를 비롯한 일본인 스승들과 교류하며 익힌 탄탄한 인체 데생, 사실적인 색채 운용, 유화 재료 사용법 등은 이후 그의 화업에 평생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광풍회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빛과 음영 처리, 인물의 질감 표현 등에서 프랑스 인상주의와 아카데믹 회화의 절충적 미감을 보여준다[25][26]. 이는 광풍회가 지향한 온건한 양화 스타일의 전형으로, 변시지는 이를 완벽히 소화하여 일본 화단이 추구하는 미의 규범을 따르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27]. 한편 광풍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변시지는 국제적 안목과 자신감을 얻었다. 젊은 조선인 화가로서 일본 미술계의 주류에 들어가 인정받은 경험은 그에게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을 주었고, 훗날 한국에 돌아와서도 예술적 자기정체성을 모색하는 데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광풍회 시절의 도전과 성취는 변시지에게 서양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그로부터 자신만의 그림 언어를 발전시킬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다.
또한 광풍회를 비롯한 일본 화단에서의 경험은 변시지 예술의 주제의식과 미학적 방향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 체류 시기의 변시지 작품들은 주로 도시 여성의 초상, 누드, 정물과 같은 인물 중심의 주제가 많았으며, 기술적으로도 사실적 묘사에 충실한 경향을 보였다[26]. 이는 일본 화단의 아카데미즘 전통과 광풍회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변시지 스스로도 당시에는 일본화가다운 냄새를 풍기는 작품을 그렸다고 회고된다[28]. 그러나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훗날 그가 한국적 소재와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할 때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예컨대, 일본에서 단련된 사실적인 드로잉 능력과 색채 감각은 그가 나중에 제주 자연을 그릴 때에도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광풍회에서 갈고닦은 기초 위에 한국적 정서와 철학을 입히는 과정이 변시지 예술의 후반기 변모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광풍회에서의 수학(修學)과 성과는 변시지가 동서양 미술 어법을 아우르는 작가로 성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 귀국 이후의 변모와 동양 미학의 접목
변시지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초방으로 1957년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뒤로하고 돌연 한국 귀국을 결행했다[29]. 31세의 나이에 내린 이 결정은, 당시 일본에 남아 있기를 권유한 가족과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30][29]. 오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그가 식민지 출신 예술가로서 느낀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이었다고 한다[30][31]. 일본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이라는 의식,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타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그의 마음속에 쌓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귀국 후 변시지는 “예술가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회화적 사명감을 느꼈다”고 밝힌 바 있는데[31], 이는 민족적·예술적 자아 찾기를 위해 새로운 환경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 돌아온 변시지는 서울대학교에서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마포중고등학교와 서라벌예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자신의 화풍을 재정립하는 과제에 몰두했다[29]. 그러나 전후 서울 화단은 국전(國展) 중심의 아카데믹한 화풍과 인맥 위주 구조가 굳어져 있어서, 제주 출신에 일본 유학파였던 그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도 있었다[32]. 변시지는 이런 장벽을 극복하는 한편으로 한층 주체적인 미의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한국에서의 초기 작품들부터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귀국 직후 변시지는 이전에 즐겨 그리던 인물화에서 벗어나 한국의 자연과 전통 풍경에 눈을 돌렸다[33]. 1960년대 초반에 그가 즐겨 찾은 창덕궁 비원(秘苑)의 정원 풍경을 소재로 한 연작은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34]. 그는 개방된 비원의 고궁 정원을 날마다 드나들며 사생을 했고, 전통 정원의 나무와 정자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35]. 이때 변시지는 일본 시절의 외광파 화풍을 부분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가느다란 붓터치와 세밀한 묘사를 발전시켰는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작업은 이전의 인상파적 접근과는 다른 기법이었다고 평가된다[35]. 그 결과 화면 전체를 빠른 터치로 대략 처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옥 지붕의 기와나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그려내는 세밀풍경화 양식이 탄생했다[35]. 이러한 변화는 변시지가 귀국 후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모색하며 이루어낸 실험으로서, 한국적 소재를 서양화 기법으로 담아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변시지는 1975년 고향 제주도로 영구 귀향하면서 화풍의 완벽한 변모를 이루게 된다[36]. 15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50세에 제주에 정착한 그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깊은 자기성찰에 몰두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를 열어갔다[36]. 2년여 간의 시행착오 끝에 변시지는 자신의 화면에 황갈색의 독특한 빛을 입히기 시작했는데, 이는 제주를 둘러싼 황토빛 대지와 하늘의 색을 화폭에 끌어들인 것이었다[36][37]. 동시에 화면 위에는 과감한 먹색의 선묘(線描)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흙빛 바탕과 검은 선의 조합은 마치 한옥 창호지의 색감 위에 동양 수묵화의 필선을 얹은 듯한 효과를 자아냈다[37]. 실제로 변시지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형들이 익히던 서예와 묵화를 곁눈질로 본 기억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회고하는데[37], 제주의 풍토를 그리기 위해 동양적 필법을 접목시킨 이러한 시도는 그의 예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제 그의 작품에는 돌담, 초가집, 해녀, 조랑말, 까마귀 등 제주 고유의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과거의 사실주의적 묘사가 아닌 황갈색과 흑색의 간결한 형태로 재구성되어 화면에 놓였다[38].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대지와 파도치는 바다는 짧고 역동적인 붓질로 표현되고, 태양이나 배와 같은 형상은 단 몇 개의 굴곡선으로 상징화된다[39]. 때로는 하늘과 바다, 섬을 나누던 경계선조차 사라져 단색의 평면처럼 보이는 대담한 구성도 나타났다[39]. 이렇듯 자연의 빛과 바람은 변시지의 화면에서 색과 선으로 변주되어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변시지만의 제주풍경화가 탄생했다[39].
변시지 귀향 후 확립된 제주 양식의 작품 한 점. 황토색으로 물든 화면 위에 검은 선으로 간략히 묘사된 제주 바다와 오름, 말 등의 형상이 보인다. 이는 변시지가 동양의 수묵화적 요소(색감과 필선)를 서양 유화에 융합한 독창적 양식으로 높이 평가된다[1] [5] [6] [12] [14] [15] [17] [18] [20] [23] [24] [29] [31] [32] [34] [35] [36] [37] [38] [39] [40] [43] [46] 서울아트가이드 Seoul Art Guide
http://www.daljin.com/column/3415
[2] [3] [8] [10] 光風会(コウフウカイ)とは? 意味や使い方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word/%E5%85%89%E9%A2%A8%E4%BC%9A-63079
[4] [7] [9] [13] 光風会100年 ── 東京ステーションギャラリーで「洋画家たちの青春 ─ 白馬会から光風会へ」 | ニュース | アイエム[インターネットミュージアム]
https://www.museum.or.jp/news/3195
[11] 寺内万治郎 :: 東文研アーカイブデータベース
https://www.tobunken.go.jp/materials/bukko/9161.html
[16] [22] [45] 변시지(邊時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275
[19] [21] 변시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B3%80%EC%8B%9C%EC%A7%80
[25] [26] [27] [28] [30] [33] [42] [44] [47] 잊힐 수 없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
[41] 변시지 - 문화예술의전당
기당미술관 설립에 얽힌 강구범과 변시지의 이야기
바다와 예술의 인연 – 기당미술관에 담긴 두 사람의 이야기
기당 강구범의 배경과 기당미술관 설립
1980년대 중반, 제주 서귀포의 언덕 위에 작고 아담한 미술관 건물이 세워졌다. 기당미술관이라 이름 붙은 이 공간은 강구범 선생이 변시지에 대한 40년전 약속을 지키며 자신의 고향 제주에 기증한 선물이었다. 강구범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재일교포 기업가였다. 한때 공장 화재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를 딛고 일어서 일본 납세 순위 2위를 기록할 만큼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번 돈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고, 변시지의 제안에 따라 말년에 고향을 위해 미술관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제주에 현대적인 미술관을 세워 지역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한 그의 뜻은 확고했다. 서울에도 시립미술관이 없던 시절, 변시지와 강구범은 섬 주민들에게 예술의 집을 선물하며 제주가 대한민국 최초의 공립미술관을 가진 도시가 되도록 만들었다. 강구범은 미술관 건물을 직접 완공한 뒤 아낌없이 서귀포시에 기증했고, 1987년 7월 1일 마침내 기당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예술로 맺어진 강구범과 변시지의 인연
강구범 선생과 변시지 화백의 인연은 고향만큼이나 깊고도 남다르다. 두 사람은 먼 친척지간으로, 강구범은 변시지의 외사촌 형뻘 되는 가까운 어른이었다. 1940년대 말, 이들은 타국 일본에서 예술을 매개로 다시 만났다. 태평양전쟁 직후 혼란스러운 오사카와 도쿄의 미술계에서, 제주 출신이라는 공통점은 두 사람을 자연스레 묶어주었다. 청년 시절의 변시지는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이어가며 “우성” 변시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강구범은 미술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사업가로서 후배 예술가를 따뜻하게 지켜보았다.
1950년 어느 이른 봄날 도쿄, 일본 미술단체 연합전의 개막식장에서 변시지는 천황의 안내자로 나서며 긴장으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때 곁에 있던 강구범이 살며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지, 긴장하지 말게. 자네는 오늘 누구보다 이 전시회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변시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잠시 뒤 히로히토 일왕이 천천히 전시장에 들어섰고. 강구범은 천황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강구범은 변시지의 예술 여정을 곁에서 응원했다. 변시지가 도쿄의 시세이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한 점을 구매하여 자기 집 안방 침대 위에 걸어,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힘들었던 젊은 예술가에게, 선배의 그 한 점 작품 구입은 돈 이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기당미술관과 변시지 작품이 전시되기까지
세월이 흘러 1970년대 중반, 변시지 화백은 오랜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로 내려왔다. 고요한 섬마을에서 그는 문득 떠오르는 빈 공간 하나를 그려보았다. 제주도에 ‘예술의 등대’와도 같은 미술관이 있다면, 후배 예술가들과 아이들에게 어떤 희망이 될까 하고 말이다. 서울 시절 만났던 제주 출신 학생들이 고향을 묻는 말에 부끄러워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문화 시설 하나 없던 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언젠가 제주에 제대로 된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그의 가슴에 싹텄다.
변시지의 이 꿈을 현실로 이뤄준 사람이 바로 강구범이었다. 마침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강구범은 고향에 기여하고픈 마음을 품고 있었다. 강구범은 변시지에게 40년전의 약속을 지키겠으니 소원을 말하라 하였고, 변시지로부터 제주에 미술관을 세우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그는 쾌히 평생 쌓아온 부를 아낌없이 내어놓으며 기당미술관 건립이 시작되었다. 강구범의 아호(雅號)이기도 한 ‘기당(奇堂)’을 딴 이 미술관은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설계와 건축 과정에서 예술가의 안목과 기부자의 의지가 어우러졌고, 1987년 드디어 고향 땅에 현대식 전시관이 우뚝 서게 되었다. 개관식 날, 강구범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라도 내 고향에 보답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변시지 역시 “이제 제주 사람도 미술관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가슴 벅찬 소회를 남겼다.
기당미술관은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강구범은 애초에 이 미술관을 “변시지를 위한 미술관”으로 세웠다고 할 만큼, 그의 작품이 고향에 영구히 전시되기를 바랐다. 개관 이후 미술관 한켠에는 “폭풍의 화가”로 불린 변시지의 대표작들이 늘 걸려 있었다.
예술적 우정으로 빚은 감동의 장면
1987년 여름, 기당미술관이 문을 열던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전시실을 둘러보던 강구범과 변시지 두 사람은 조용히 마주 서서 노을에 물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열린 창으로 살랑이고, 붉은 석양빛이 변시지의 캔버스들 위로 내려앉았다. 강구범은 미술관 정문 옆에 세워진 자신의 흉상을 힐끗 보더니 쑥스럽다는 듯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변시지의 작품 앞에 섰다.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제주 바다를 그린 대작 앞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그림에는 태풍처럼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화가의 혼이 담겨 있었고, 그 그림을 품은 미술관에는 예술을 사랑한 사업가의 마음이 스며 있었다.
강구범은 나직이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이제야 해냈군... 우리 고향에도 이런 날이 와.” 변시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형님 덕분입니다.” 평생 현실과 예술의 거친 바다를 함께 건너온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변시지가 살며시 강구범의 손을 잡았다. 굳은 살 박인 기업가의 손과 물감 얼룩진 예술가의 손이 맞닿는 순간, 기당미술관에 흐르던 공기는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이, 그날 그 자리에서 하나의 결실로 영글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년도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왔다. 해 질 녘의 미술관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고요했다. 강구범은 먼 수평선을 가만히 응시했고, 변시지는 눈앞의 작품들이 풍겨내는 빛을 음미했다. 둘의 머릿속에는 지나온 세월의 그림들이 스쳐갔다. 황무지 같았던 제주에 문화의 씨앗을 심겠다고 다짐하던 순간들, 낯선 이국땅에서 서로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쌓아온 예술과 삶의 이야기들…. 모든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고맙습니다.” 문득 변시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구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더 고맙지.” 미술관 너머로 붉은 태양이 바다에 잠겨들고 있었다. 늦은 바람이 와락 불어와 둘의 흰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먼 옛날 제주 바람이 소년 시절의 그들을 쓰다듬던 기억처럼, 이날의 바람도 두 노인을 부드럽게 감쌌다. 강구범과 변시지,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듯 바람 같은 시간과 바다 같은 세월을 지나 한 채의 미술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주 섬 끝자락에 자리한 기당미술관은, 서로를 아끼고 예술을 사랑한 이들의 우정이 남긴 아름다운 결실로 오늘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위 카테고리
그림의 언어
그림의 언어
예술은 때로 언어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변시지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러한 초월적 언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의 화폭에 펼쳐진 빛과 색, 그리고 선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보이지 않는 감정과 기억, 정신적 풍경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변시지의 예술적 여정은 동서양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적 도전이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의 서양화 수학으로 시작된 그의 여정은 한국의 전통미와 만나 독자적인 미학 언어로 승화되었습니다.
1975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선택한 제주도로의 귀향은 그의 예술 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섬의 풍경, 하늘을 가르는 까마귀의 날갯짓, 제주의 땅을 달리는 말들...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은 그의 붓끝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이야기로 되살아났습니다.
변시지의 그림 속 자연은 더 이상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희망과 고뇌, 그리고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상징적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간 내면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점입니다. 그는 자연에서 발견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재창조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감동과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추억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인생의 큰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 글은 독자 여러분을 변시지의 예술 세계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의 붓질 하나하나에 깃든 철학적 사유와 미학적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의 열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예술과 삶의 본질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화폭에 담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동으로 피어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