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색채에의 도전과 실험

23. 색채에의 도전과 실험


근대회화에서 색채에 대해 온 생애를 걸었던 사람은 들라크루아였다. 그로 인해 그는 19세기 최대의 색채화가로서의 역사적 위치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근대회화의 위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자연과 사물, 자기 작품과 남의 작품 모두에 날카로운 관찰의 시선을 던졌으며, 그의 태도는 예술적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얻은 교훈과 경험을 배울 뿐 아니라 그것을 섬세하게 분석 검토하여 메모했다. 

그의 노트는 막대한 분량이어서, 오늘날까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52년 그의 쉰네 살 때의 일기에 "모든 회화에 있어 회색은 적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후에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그대로 활용되었던 유명한 명제인 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컬어지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림은 옆으로 들어오는 광선으로 보게 된다. 따라서 화면은 실제 이상으로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색조의 명도를 될 수 있는 한 높일 필요가 있다. 정면으로 오는 광선이 진실이라면 그 밖의 광선으로 보는 경우는 진실이 아니다. 루벤스나 티치아노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색조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이다. 베로네세는 너무 진실을 추구한 결과 때로는 화면이 회색으로 되어 버릴 때도 있다."

들라크루아는 색채화가로서 체질적으로 루벤스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에 관한 노트도 많다. 언제나 그 특질을 비교 관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또 '색채의 색과 빛의 색을 동시에 융화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빛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화면의 중간색을 잃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들라크루아의 수기에는 이와 같은 고전회화의 특질의 비교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당시에는 물감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투명기법에 대해서도 많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자연의 관찰에 관한 메모 또한 정밀한 것이어서, 과학자 슈브뢸의 「동시 반영에 관한 콘트라스트의 법칙」이 발표된 1827년에 비해 그의 색채에 관한 지식은 매우 선구적인 것이었다.

근대회화의 시발점은 인상파의 출현부터이고,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들라크루아의 색채관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대담하게 실천에 옮기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에게서 직접 배운 것은 아니었다.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 역시 들라크루아 못지않은 색채의 화가였다. 인상파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현상 추구를 목표로 했으므로 그들이 현상적 변화의 풍부한 풍경을 그리는 데 흥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외광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같은 장소에 대해서도 다양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주장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시종 풍경화에 매달리게 되었다.

마네는 자연을 올바르게 관찰하면서 색조에 의해 실제로 양감을 표현했다. 마네의 이 같은 작업은 근대회화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마네가 활약한 시대는 색채냐 형태냐의 이론이 분분할 때였다. 색채와 데생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드가는 "나는 선을 가지고 하는 색채가다"라고 말했다. 드가는 형태에서는 앵그르를, 색채에서는 들라크루아를 존중한 것이다.

르누아르를 놀라게 하고 부러움을 느끼게 했던 드가의 파스텔화의 색채는 파스텔을 태양 빛에 쬐어 될 수 있는 한 색을 낡게 만들어 쓴 것이었다. "무엇을 썼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색이 나타나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어오는 르누아르에게 그는 "차분한 색을 썼지요"라고 대답했다. 드가나 피사로가 인상파의 선배 내지는 선도자였고, 마네나 그 주변에 모인 청년 화가들의 그룹은 당초 제 나름의 개성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인상파 화가라 부를 수 있는 대표적 화가는 모네였다.

모네는 인상파의 새로운 시대를 확고히 한 사람으로서 이때는 들라크루아가 죽은 지 삼십 년이 지난 1890년대에 들어선 때였다. 이 무렵 그가 시도했던 〈낟가리〉 연작은 모네 예술의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지베르니의 초원에서 여름의 강렬한 햇빛 아래 숲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 그리려 했으나 얼마 안 가서 해가 짐에 따라 색채가 변하고 풍경도 변했다. 나는 여러 점의 하얀 캔버스 위에 빛과 그림자의 중요한 부분을 되도록이면 빨리 그렸다. 다음 날도 나는 같은 장소에 가서 한층 세밀히 관찰하면서 사생을 계속했지만, 그 여름만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했다. 겨울이 되면서 광선은 숲과 그 주변을 여름보다 더욱 강한 색조로 만들었고, 그것은 거의 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서적인 것이었다. 또 안개가 낀 숲의 그 희미한 형태는 말할 수 없는 신비한 색조를 느끼게 했다. 이와 같이 해서 그 해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숲이 단순한 습작이 아니라 커다란 연작이 되었던 것이다."

모네는 이 연작에서 색채를 최고도로까지 분석하고, 풍부하면서 힘찬 자연의 인상을 재현했던 것이다. 색채의 효과를 자연의 참다운 실제의 색조에 가깝게 근접시키려는 이러한 노력은 원색의 사용에 의한 색조의 분할 등 될 수 있는 한 순도를 높이는 연구를 낳게 한 것이다.

<예술과 풍토, 변시지>

🧭 시군

“들라크루아는 ‘회색은 적’이라 했고, 강한 색 대비로 감정을 표현했어요.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변화와 색의 순간성을 끝없이 실험했죠. 그렇다면 서양 미술의 색채 실험은 물질과 과학을 넘어서, 감정과 감각을 깨우는 탐험이었던 걸까요?”

🍃 지양

“동양은 오방색과 여백 속 절제된 색 한 방울로 계절, 기운, 정서를 표현했어요. 단청처럼 색의 배열로 우주 질서를 드러내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동양의 색채 실험은 양이 아니라 관계와 기운의 흐름에 집중한 것 아닐까요?”

🌿 시지의 대답

색은 눈으로 보는 빛이자, 마음으로 느끼는 온도입니다. 서양은 광학·물질·감정 실험을 통해 색의 경계를 넓혔고,
동양은 여백과 조화를 통해 색의 여운을 심화했습니다.

👉 색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불꽃, 시간의 흐름, 자연의 숨결을 담는 예술의 심장입니다.


👥 대상별 조언

🎓 학생에게

“같은 파랑도 밝기와 채도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줘요. 햇살 속 파랑, 비 오는 날 파랑—직접 실험해 보면서 색이 전하는 감정을 느껴보세요.”

👥 일반인에게

“해 질 무렵 집 안 벽에 비치는 주홍빛이 포근하게 느껴질 때 있죠?
색은 단지 보는 게 아니라, 몸과 기분 전체를 흔드는 에너지입니다.”

🖼️ 컬렉터에게

“고채도 작품은 공간에 강한 맥박을, 저채도 작품은 잔향과 깊이를 줍니다. **전시의 흐름을 색의 고저(高低)**로 구성해 보세요.”

🎨 화가 지망생에게

“혼색에 집착하지 말고, 원색을 직접 부딪히게 해 보세요. 또는 색을 지워보세요.
변시지 화백은 황토와 먹으로 자연의 색을 통제하며, 그 안에 기운과 정서를 새겨 넣었습니다.


🌀 변시지의 사례

〈바람 위의 노을〉캔버스 대부분을 황토빛으로 눌러 그림자의 용기를 만들고, 수평선에 주홍 한 획으로 노을, 정서, 에너지를 폭발시킴.

👉 변시지에게 색은 단지 색이 아니라, 흙의 맛, 바람의 감촉, 기억의 온도였습니다. 그의 색채 실험은 서양의 강채도와 동양의 여백미를‘풍토의 색’으로 재구성한 독자적 미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