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순간적으로찾아온다.
번개처럼, 섬광처럼, 찰나를 붙잡듯이.
그러나 '선(線)'은 시간을 머금고 온다.
빛의 속도는 우주에서 가장 빠르다고 한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돌 수 있는 속도.
그렇다면 선의 속도는 어떨까?
선은 화가의 호흡처럼 느리고, 마음의 맥박처럼 부드럽다.
한때 나는 빛의 속도를 따라 그림을 그렸다.
순간의 아름다움, 갑작스러운 감동을
재빨리 캔버스에 옮기려 했다.
인상파 화가들처럼, 변화하는 빛을 재빠르게 붙잡으려 했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
노을지는 찰나,
파도가 부서지는 그 순간을.
그러나 제주에 와서,
나는 천천히 그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빛은 공간을 지배하지만,
선은 시간을 지배한다.
빛은 눈을 자극하지만,
선은 마음 깊이 스며든다.
빛은 폭발하지만,
선은 지속된다.
선을 그으면서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붓이 종이에 닿는 순간부터,
선이 끝나는 순간까지 ——
그 안에는 무수한 시간의 층이 쌓여 있었다.
한 줄의 선에는, 화가의 전 인생이 압축되어 있었다.
빠른 선은 충동적이고, 피상적이었다.
하지만 느린 선은 깊고 사려 깊었다.
그 선에는 망설임도, 확신도,
후회도, 희망도담겨 있었다.
그래서 선의 굵기와 농담은 미세하게 변화했다.
어느 날, 석양이 은빛 들판을 붉게 물들였을 때
나는 서두르지 않고 붓을 들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황급히 그 장면을 스케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그 순간을 그저 눈에 새겼다.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풀잎의 색이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그 전체 과정을 지켜보았다.
빛의 드라마가 끝난 뒤,
나는 마침내 붓을 들었다.
그 순간의 빛은 이미 사라졌지만,
내 안에는 그 흔적이 더 깊게 새겨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빛을 그리는 것 —
그것이 내가 배운 새로운 방식이었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한 줄을 그기 위해서도 긴 호흡이 필요했다.
숨을 들이쉬고,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며 선을 그었다.
선은 내 호흡과 함께 태어났다.
이 느림 속에서,
나는 내면의 동요와 떨림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그은 선은 금방 바랬지만,
천천히 그어진 선은 깊고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
천천히 자랄수록 단단하고 아름답다.
선을 그으면서, 나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빠르게 하려 한다.
패스트푸드, 고속 교통, 초고속 정보.
그러나 어떤 것들은 서두를 수 없다.
사랑, 우정, 그리고 진정한 예술은.
제주는 내게 빛을 보는 방식을 바꾸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찬란한 찰나를 좇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빛의 자취를 따라 그림을 그린다.
어둠이 빛 뒤에 남긴 미세한 떨림,
빛보다 느리게 스며드는 선의 감각을 좇는다.
그림이란 결국,
빛과 어둠의 경계,
그 틈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이었다.
그 경계에서 빛과 어둠이 만나고,
빠름과 느림이 조화를 이룬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가장 아름다운 선을 발견했다.
느린 선이 하나하나 쌓여
시간이 되고, 감정이 되고,
마침내 인생의 궤적이 되었다.
이제 나는 빛보다 느린 선을 따라 그리며,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짜 나를 만나고 있다.
빛보다 느린 선은, 그러나 빛보다 오래 남는다.
빛은 순간이지만,
선은 영원이다.
그 영원을 향해,
나는 지금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