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사이의 미로
기이하게 길어진 그림자, 비어 있는 광장. 데 키리코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고요하게 비틀었다
광장은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지만, 데 키리코의 화폭 속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무대가 됩니다. 토리노의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 장면은 현실적 재현처럼 보이지만, 곧 꿈의 한 장면처럼 낯설게 다가옵니다.
길게 뻗은 아케이드의 그림자, 차갑게 솟은 시계탑, 멀리 보이는 기차의 선율 같은 선. 모든 것이 사실적인 듯 배열되어 있으면서도, 그 정적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고요가 겹쳐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세계의 입구 같습니다.
전경에서 소녀가 굴리는 후프와 그 그림자는 유난히 길게 늘어나 있습니다. 태양이 낮게 걸려 있음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화면 전체의 빛은 맑은 한낮의 빛깔을 띱니다. 이 모순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언제나 이런 이율배반이, 서로 모순된 세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데 키리코는 1910년대 파리에서 ‘형이상학적 회화’를 선언하며, 외적 현실을 넘어선 세계를 탐구했습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눈앞의 사실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이 은밀히 품고 있는 신비로운 의미였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의 사유,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그에게 세계의 이면을 열어 보이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의 광장은 언제나 비어 있고, 건축물은 침묵하며, 기차는 저 멀리 달리지만 결코 도착하지 않습니다. 이 정적은 단순한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현대 도시가 품은 소외와 불안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간혹 화면 속에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이 등장할 때, 과거와 현재, 신화와 현실은 한데 뒤엉키며 시간은 직선이 아닌 순환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낮과 밤, 현실과 꿈, 근대와 고대가 하나의 장 안에서 교차하는 순간—데 키리코의 회화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세계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의 그림 앞에 선 우리는 현실을 떠난 듯, 그러나 결코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채, 그 경계에서 머뭅니다.
데 키리코의 회화는 19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막스 에른스트와 르네 마그리트는 그의 ‘놀라운 만남’의 미학을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작 데 키리코 자신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고전적 화법으로 회귀하며, 자신의 초기 혁신을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20세기 환상 예술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남았습니다.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늦은 오후, 운동장에 혼자 남아 있던 고요한 순간, 길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느껴지던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 데 키리코는 바로 그러한 일상의 신비를 포착하는 천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