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프란시스 베이컨 – 〈교황 이노센트 10세를 위한 습작〉

권위의 몰락과 인간의 절규

비명을 지르는 얼굴, 뒤틀린 형상. 베이컨은 권위의 상징을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 속에 가두었다

벨라스케스의 고전적 교황 초상화를 베이컨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이 연작은 보는 이를 소름 돋게 합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인 교황은 유리 상자 안에 갇힌 채 절규하고 있으며, 얼굴은 흐릿하게 번져 사라지고 입은 검은 구멍처럼 벌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해체된 형상은 권위의 무력함과 인간 존재가 지닌 근본적 불안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베이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실존적 위기와 홀로코스트가 남긴 집단적 트라우마를 회화로 번역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육체는 고문당하고 변형된 살덩어리였고, 모든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권위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교황조차 고통받는 한낱 인간일 뿐임을 그는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일부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권력에 짓눌린 민중의 고통을 형상화한 그림들처럼, 베이컨 역시 억압과 고통을 포착합니다. 그러나 그의 절규는 특정 정치적 맥락을 넘어,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실존적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 속, 총에 맞아 비명을 지르는 유모의 장면은 이 연작에 직접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베이컨은 회화를 “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 매체”라고 보았으며, 아름다움보다 진실을 추구했습니다.

유리 상자는 현대인의 고립과 격리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던 베이컨 자신의 억압된 감정과 은밀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투명한 감옥 속에서 절규하는 교황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의 소외를 강렬하게 시각화합니다.

붓질은 거칠고 직관적이며, 색채는 어둡고 불길합니다. 이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베이컨은 완전한 추상을 끝내 거부했습니다. 그는 “추상 미술은 게임일 뿐”이라 말하며, 인간 실존의 조건을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구상 회화의 가능성을 끝까지 탐구했습니다.

베이컨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예술로 승화했습니다. 이 연작은 20세기 후반 영국 회화의 독창적 성취이자, 전후 유럽 정신사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언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