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도시의 불안한 초상
거리를 걷는 인물들의 표정은 긴장과 소외로 굳어 있다. 색은 불안하게 떨리고, 선은 불협화음을 낸다. 도시의 속도가 사람을 삼킨다
베를린의 번화가.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연두빛으로 뒤틀리고, 그림자는 보라색으로 일그러지며, 노란 건물들이 차갑게 뒤엉켜 서 있습니다. 키르히너의 붓끝은 도시를 생생히 기록하면서도, 그 속에 스며든 불안과 소외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화면 속 사람들은 걷고 있지만, 그 발걸음은 기계적입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들처럼, 무표정하고 경직된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부품처럼 보입니다. 원시미술과 아프리카 조각의 단순화된 형태는 문명인의 가면 뒤에 숨겨진 원초적 공포를 드러냅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면 우리나라 1970년대 산업화의 기억이 겹쳐집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움직이는 공장 노동자들, 급격한 변화 속에 지쳐간 얼굴들. 키르히너가 그린 독일인의 얼굴에서 그 동일한 피로와 불안을 읽습니다.
이 색채는 현실을 모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정의 울부짖음, 영혼의 불협화음입니다. 연두색 얼굴과 보라색 그림자, 노란 건물들이 만든 부조화는 현대 도시가 삼킨 인간의 고독을 폭로합니다. 인상주의가 빛의 조화를 탐구했다면, 표현주의는 불안의 그림자를 그린 것입니다.
키르히너의 붓질은 거칠고 불안정하며, 목판화 같은 강렬한 선은 독일 고딕 미술의 전통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립니다. 뒤러와 홀바인의 판화가 지녔던 직설적 힘이, 이제 도시의 소음과 군중의 혼돈 속에서 재현됩니다.
1913년, 1차 대전을 앞둔 유럽은 이미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키르히너는 전쟁에 징집되어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고, 그의 예술은 나치 치하에서 ‘퇴폐’라는 낙인을 받으며 억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그림은 시대의 불안 그 자체를 꿰뚫는 증언이 되었습니다.
표현주의는 외부의 현실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을 우선시했습니다. 키르히너의 그림은 도시가 삼켜버린 인간의 영혼을 드러내며, 동시에 묻습니다. “이 불안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성 회복의 시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