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무 - 순환하는 시간 속의 고독한 항해

1980 Untitled (831)39.8x20.8

1. 황혼의 무대 위에서

변시지의 화폭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황혼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는 두 개의 대조적인 움직임이 교차한다. 하늘에서는 까마귀들이 원을 그리며 끝없이 회전하고, 땅에서는 한 사람이 작은 배에 몸을 맡긴 채 동쪽을 향해 노를 젓고 있다. 이 두 움직임 사이에서 우리는 존재의 근본적 모순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2. 원형의 철학 - 까마귀의 춤

하늘을 선회하는 까마귀들은 단순한 새가 아니다. 그들은 시간의 화신이자 운명의 메신저다. 원을 그리는 그들의 비행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연상시킨다. 모든 것이 되돌아오고, 모든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적 질서 속에서 까마귀들은 그 순환의 증인이 되었다.

그들의 검은 실루엣은 황금빛 하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변증법적 관계를 상징한다. 까마귀는 전통적으로 죽음의 전령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생명력 넘치는 움직임으로 그려진다. 죽음조차도 삶의 한 부분이며, 끝은 곧 새로운 시작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3. 직선의 의지 - 동쪽으로의 항해

화면 하단의 작은 인물은 전혀 다른 철학을 체현한다. 그는 원형의 순환에 맞서 직선의 의지를 관철한다. 동쪽으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태양을 쫓는 행위, 즉 빛과 희망을 향한 끝없는 추구를 의미한다.

조각배라는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거대한 바다 앞에 무력해 보이는 작은 배, 그러나 그 안에는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다. 사르트르가 말한 '상황에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파스칼의 표현대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지만, 그 연약함 속에 우주를 초월하는 정신의 힘이 있다.

4. 황혼이라는 시공간

황혼은 단순한 시간대가 아니라 존재론적 경계선이다. 낮도 밤도 아닌 그 애매한 시간대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모호함을 반영한다. 우리는 명확한 답을 갖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삶의 의미도, 죽음의 실체도, 사랑의 진실도 모두 황혼처럼 흐릿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변시지의 황금빛 하늘은 우울함보다는 숭고함을 자아낸다. 불확실성은 절망이 아니라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5. 고독의 변증법

이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독의 이중적 성격이다. 까마귀들은 무리를 이루어 날지만 각자 자신만의 원을 그린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다. 반면 배 위의 인물은 철저히 혼자이지만 우주적 질서와 대화하고 있다.

진정한 고독은 버림받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깊은 만남이다. 릴케가 말했듯이 "고독 속에서만 우리는 진정 자신이 된다." 그림 속 인물의 고독한 항해는 바로 그런 자기 발견의 여정이다.

6. 시간과 공간의 초월

이 작품에서 시간은 직선적이면서 동시에 순환적이다. 까마귀의 원운동은 시간의 순환성을, 배의 직진은 시간의 직선성을 보여준다. 이는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의 개념과 연결된다. 물리적 시간과 의식적 시간이 다르듯, 존재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공존한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은 무한의 영역이고, 바다는 가능성의 영역이며, 그 경계선인 수평선은 꿈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이다. 작은 배는 이 모든 영역을 가로지르며 존재의 여행을 계속한다.

7. 예술가의 시선

변시지는 이 모든 요소들을 황금빛 색조로 통일시켰다. 이는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철학적 진술이다. 삶의 모든 순간들—고통도, 기쁨도, 절망도, 희망도—이 결국은 하나의 황금빛 존재 체험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다. 그는 까마귀와 함께 날고, 뱃사공과 함께 노를 젓는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존재에 대한 명상이며, 캔버스는 철학적 사유가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