㉖ 증여로서의 그림
자화상
01. 자화상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나를 그렸다.
1945년 38x45Cm
백색가옥과 흑색가옥
02. 백색가옥과 흑색가옥
-흑백의 시선 속에서-

흰 집은 침묵했고
검은 집은 등을 돌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마음은 아직 나뉘어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선 하나를 그었다.

빛도 어둠도 아닌,
숨 쉴 수 있는 여백.

구호가 아닌, 떨림을.
선언이 아닌, 공기를.

그게 내가 택한 그림이었다.
1946년 117x81Cm
거울나무
03. 겨울나무

겨울나무는 말없이 빛을 견딘다.
아직 전쟁의 기억이 남아 있던 그 땅 위에서
나무들은 몸을 비워낸 채,
고요히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은 나무의 빈 가지를 어루만지고,
흙 위에 기다랗게 그림자를 눕혔다.

황량함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로 생을 견디는 일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 겨울의 숲에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을 배웠다.
1947년 90x66Cm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04.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그의 손끝에서 선율은 흐르지 않았다.
군복의 시간 속에서
남자의 표정은
말없는 침묵이었다.

삶의 소리가 무겁고 낮게 흐르던 때,
그는 현 위에 손을 올린 채
자신의 마음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 그의 바이올린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아니라
세상을 견디는 도구였고,
연주되지 않은 음악은
그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그의 침묵은 파장이 되어
내 가슴을 두드렸다.
1948년 110x83Cm
오후
05. 오후

오후의 햇살은
낡은 담장을 넘어
철로 위에 길게 눕는다

기차는 오지 않았고
기다림만 남았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렸다

1950년의 오후
멈춰버린 그 시간 위에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기다림은
늘 그렇게
말없이 아프다
1950년 146x112Cm
겨울길
06. 겨울길

겨울길 위에
발자국은 조용히 쌓이고
지나가는 이는 홀로
작은 그림자가 된다

추위는 길고
침묵은 깊었지만
사람은 지나가고
삶은 멈추지 않았다

1952년 겨울
내 마음도
그 길 위를
홀로 걷고 있었다
1952년 83x110Cm
막다른 골목
07. 막다른 골목

벽돌 담 사이로 막다른 골목이 보인다.
창문은 닫혀 있고, 나무 한 그루만
말없이 서서 빈 가지를 하늘로 뻗는다.

1958년, 삶은 때때로 이렇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을 내어준다.

그 골목 끝에서 나는 잠시 서서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길이
결국 막다른 골목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곳엔 창이 있었고, 빛이 있었으며
무언가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다.

막힌 길 끝에 서서야 깨달았다.
삶은 때로 길이 아니라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것임을.
1958년 50x60Cm
짐꾼
08. 짐꾼

어깨 위에 짐을 올린 순간,
세상은 그의 발밑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1958년, 삶은 등짐이었다.
걸을 때마다 어깨는 낮아졌고,
걸음을 멈출 때마다
마음은 더 깊이 침묵했다.

그가 지고 가는 것은 짐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이었고
우리의 마음이었다.

결국엔 버릴 수 없는 꿈이어서
그는 다시 짐을 고쳐 지고
낮은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짐꾼의 뒷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의 모습이었다.
1958년 45x53Cm
소녀와 밥상
09. 소녀와 밥상

소녀는 밥상을 들고 있었다.
밥상 위에 놓인 생선 한 마리,
그 위로 어린 눈빛이 조용히 머물렀다.

1958년, 먹는다는 것은
그저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었다.
작은 밥상 위에 놓인 것은
한 가족의 삶이었고, 소망이었고,
때로는 말없이 감내해야 할
슬픔 같은 것이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 작은 손으로 삶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세상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삶은 작은 밥상 위에 담긴
소박한 기적이라는 것을.
1958년 53x46Cm
10. 길

길 위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푸르게 빛났고
하나는 메말라 있었다

앞선 나무엔 젊은 날이 피어나고
뒤에 선 나무엔 늙은 날이 머물렀다

나는 그 사이에서 걸으며
젊음은 지나가고
늙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73x91Cm
가을 부용정
11. 가을 부용정

정자 위에 내려앉은 가을은
바람 속에 쓸쓸히 흔들렸다

왕의 정원에
이제는 아무도 없고
흩어진 기억만이
물결 위에 머물러 있다

고요함은
고운 단풍잎처럼
조용히 내려앉아
지나간 시간을 말없이 덮는다

부용정에서
화려함 뒤에
숨겨져 있는
고독을 보았다
1969년 65x53Cm
가을의 비원
12. 가을의 비원

가을이 오면
비원은 말없이 낮아진다
화려했던 모든 것들은
조용히 흩어지고
낙엽은 기억처럼 쌓인다

바람 속에
지난 시간의 웃음과 한숨이
낮은 목소리로 들려온다

비원에서
흩어진 기억들을 바라보며
삶이 결국
이 침묵을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1970년 65x53Cm
애련정
13. 애련정

물 위의 그림자는
늘 흔들린다
애련정 처마 끝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며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닿지 않는 것을
끝없이 바라보는 일

흔들리는 그림자와
나의 닿지 못한 마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1971년 160x112Cm
해신제
14. 해신제

바다는 늘 무언가를 데려간다

오늘도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와
말없이 슬픔을 쓸어갔다.

남은 사람들은 바위 위에 모여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간절히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 위로
바람과 하늘만이 듣는 조용한 기도가 울려 퍼진다.

보이지 않는 그리움과
닿을 수 없는 슬픔은
파도에 씻겨,
다시 먼 바다로 흘러간다.

제사란 떠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견디기 위한 의식이었다.
1976년 39x21Cm
해촌
15. 해촌

바닷가 마을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
낡은 초가지붕과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고요히 서 있다.

바다는 말이 없었고,
파도는 마을 가까이까지 다가와
오래된 슬픔을 내려놓았다.

하늘에 떠 있는 낮은 구름들은
마을 사람들의 작고 소박한 꿈처럼
어디로 갈지 모르고 떠다닌다.

삶은 고단했지만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그저
파도처럼 밀려오고 물러나는 하루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1978년 53x46Cm
멍든 돌하르방
30. 멍든 돌하르방

홀로 서 있는 돌하루방
멍든 눈으로
바다를 본다

세월은 지나가고
사람들은 떠나고
남겨진 것은
바람뿐

그의 멍은
떠난 이들의
남겨진 마음이었다

말없이 서서
모든 아픔을 안고
돌하루방은
바라보고만 있었다
1998년 16x23Cm
다시 이어진 길
29. 다시 이어진 길
황금빛 언덕 위
길이 이어져

처음은 절벽으로
나중은 집으로 향하네

바다는 꿈을 부르고
집은 귀향을 말하니

벼랑 끝 서성이다
다시 돌아온 집 앞에서

날개를 접은 일상도
날개를 피는 이상도
모두가 삶이 된다
1998년 160x130Cm
좌도 빈집, 우도 빈집
28. 좌도 빈집, 우도 빈집

두 채의 빈집 사이
한 노인이 서 있다

닫힌 문은 두려움을
열린 창은 희망을 품고

돌담과 바다 너머로
황금빛이 스며든다

어느 길을 택하든
그 길이 삶이 되리니
1997년 160x130Cm
심우도(尋牛圖)
27. 심우도(尋牛圖)

바람이 지나는 길 위에서
나는 내 마음을 잃어버렸다.
어디쯤 놓아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마음을 찾기 위해
끝없는 황톳길을 걷는다.

멀리 서 있는 소 한 마리,
그것은 나의 마음인가,
아니면 찾아 헤매는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나인가.

삶이란 결국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다.
때로는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때로는 고요한 산 아래서.

길 위의 나는 오늘도 걷는다.
마음의 소를 찾을 때까지.
1997년 130x160Cm
소식
26. 소식

늙은 말 한 마리
초가집 앞에 서서
잊히지 않는 발자국을 기다린다

무수한 별들이 내려앉은 밤
파도는 그리움을 품고 밀려왔다 밀려가고
바람은 어디론가 전하지 못한 말을 띄운다

말은 안다
떠난 이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그래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까마귀는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빛 속에 숨은
그 사람의 소식을 전한다
1991년 32x41Cm
떠나가는 배
25. 떠나가는 배

말 한 마리
작은 섬에 남겨졌다
소나무 하나에 기대어
배를 바라본다

1985년의 바다
떠나는 배 위로
그리움 하나가 실려 있다

남겨진 것은 섬이었고
떠나는 것은 배였고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었다

말없이 서 있는 말 한 마리
끝없이 바라보는 섬 하나
우리 삶도 그렇게
무언가를 떠나보내며
작은 섬 위에 남아 있었다
1985년 31x21Cm
그리움
24. 그리움

언덕 위에 앉아
바다를 본다
멀어지는 배 한 척에
그리움 하나를 실었다

그리움이란
멀어져 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

배는 결국 사라졌지만
언덕 위 나는
아직도 그곳에 앉아 있다
1987년 20x39Cm
그리움
손잡기
23. 손잡기

세상에는 수많은 손이 있다.
다가가는 손, 붙잡는 손, 그리고 놓치는 손.

어느 날 작은 배를 위해,
땅과 해가 손을 맞잡은 장면을 보았다.

황금빛 석양이 땅 끝에 닿는 순간,
해는 땅을 붙들고 땅은 해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사이 작은 배 한 척은 위태롭게 흔들리며
놓을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손을 잡는다는 건
서로를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무너지는 삶을 함께 붙잡고
흔들리는 마음을 함께 견디는 일.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결국 그 손을 놓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1982년 34x20Cm
손잡기
선착장
22. 선착장

선착장 끝에 놓인 짐
주인을 기다리는 듯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있었다

1979년의 바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짐만 홀로 기다렸다

삶이란,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놓인 짐 같은 것

기다림이 깊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졌고
짐은 하루를 견디며
바다만 바라보았다
1979년 31x16Cm
선착장
제주섬
21. 제주섬

섬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섬이 된다.

1979년, 제주의 바닷가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댄 채 작은 섬을 이루고 있었다.

파도와 바람 속에서도
해녀들은 말없이 어깨를 맞대고,
함께 흔들리며 하루를 견뎠다.

멀리 지나가는 배 한 척은
그들의 외로움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진짜 섬은 파도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있다.
1979년 37x20Cm
제주섬
어머니와 물고기
20. 어머니와 물고기

어머니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모래 위에 펼쳐진 몇 마리의 물고기,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아이.

멀리 배 한 척이 수평선을 지나갈 때,
어머니는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며 말없이 바다를 보았다.

작고 여윈 어머니의 어깨 위에
삶의 무게가 조용히 내려앉았고,
아이의 눈빛에는 바다보다 깊은 질문이 일렁였다.

모래 위 작은 물고기들처럼
그들의 삶도 작고 소박했지만,
그 작은 삶 속에 큰 바다가 있었다.
1979년 37x21Cm
어머니와 물고기
해녀
19. 해녀

해녀는 바다에서 나와
모래 위에 삶을 내려놓았다
몸에 남은 소금기처럼
짙은 슬픔과
깊은 고단함

바다는
그녀의 숨결로 가득했고
파도는 말없이
그녀의 삶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오늘도 바다를 견디며
바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1979년 16x24Cm
해녀
까마귀와 나
18. 까마귀와 나

모래 위에 엎드린 나
그 곁에 까마귀가 있었다
서로 말없이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까마귀는 또 다른 나였고
나는 또 다른 까마귀였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외로웠다
1979년 38x25Cm
까마귀와 나
이어도
17. 이어도

헤어짐을 배우는 섬, 이어도.
그곳은 닿는 곳이 아니라 헤어지는 곳이었다.

수평선 저 너머로
떠난 이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닿을 듯 닿지 않고, 머물 듯 머물 수 없는
이어도는 그래서 더 슬프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별을 맞이한다.
가장 먼 바다, 가장 먼 섬으로 떠나보낸 후에야
삶은 비로소 이별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이어도는 헤어짐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섬,
남은 이들이 끝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섬이었다.
1978년 53x46Cm
이어도
바람
16. 바람

바람은 지나갔지만
그림자는 남아 있었다
흔들린 나무 아래
고요히 누운 시간

삶이란
흔들림을 견디며
보이지 않는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일이었다

바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남은 건 오직
긴 그림자뿐이었다
1978년 31x16Cm
 

작품은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이다.
나는 오랫동안 ‘완성’이란 나의 내적 해답을 화면에 고정하는 것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림은 내 손을 떠날 때 비로소 세상에 닿아 완성된다.

받는 이의 호흡, 기억, 고통, 기도 속에서만
그림은 자기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낸다.

증여란 일방의 내어줌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설을 붙이지 않고,
그저 내어놓는다.

서명을 삼가는 것,
화면을 끝까지 메우지 않는 것,
해설을 최소화하는 것——
그 모든 행위는 증여의 예법이다.

나는 다만 건넌방의 뱃사공처럼
작품이 저쪽 언덕에 닿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본다.

그리고 그 언덕은 언제나
내가 알 수 없는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