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게르하르트 리히터 – 〈압상〉

흐려진 기억 속에서 찾은 진실

희미하게 번진 이미지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겹칩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기억의 불확실성을 화면 위에 고정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압상(Blur)〉 연작은 사진을 바탕으로 한 회화 위에 흐림 효과를 덧입힌 작업으로, 단순한 기법의 실험을 넘어 기억과 시간, 이미지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성찰의 결과입니다.

리히터는 가족사진이나 풍경사진을 캔버스에 옮긴 뒤, 젖은 붓으로 이미지를 번져 흐릿하게 만듭니다. 선명했던 모습은 희미해지고,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흔들립니다. 이는 시간이 기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장치입니다. 우리가 간직한 기억 또한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월과 경험에 따라 끊임없이 흐려지고 다시 쓰이며 때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동독에서 태어나 서독으로 이주한 리히터에게 ‘기억’은 언제나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의 압상 연작은 나치 시대, 분단과 통일이라는 독일 현대사의 무거운 맥락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리히터는 1960년대부터 신문과 잡지에서 이미지를 가져와 회화로 옮기며, 회화와 사진 사이의 긴장, 이미지가 지닌 진실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실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작의 흔적이 드러나며, 그 흐림의 기법은 바로 그 조작을 드러내는 방식이 됩니다.

리히터의 회화 앞에 서면, 우리는 이미지가 결코 객관적 진실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해석과 왜곡, 그리고 망각의 힘에 의해 형성됩니다. 압상은 이 불완전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며,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우리를 서게 합니다.

오늘날 리히터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생존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성취는 단지 미술 시장의 지위를 넘어, “회화는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낸 데 있습니다. ‘회화의 죽음’이 선언된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회화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기억을 붙잡고, 시간을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