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뭉크 – 〈절규〉

현대인의 실존적 고독

붉은 하늘과 일그러진 강변, 그리고 무언의 외침. 뭉크는 인간의 고독을 색과 선으로 형상화했다. 절규는 소리보다 더 깊게, 보는 이의 정신 속에 각인된다

오슬로 근교의 어느 황혼, 뭉크에게 갑작스럽게 몰려온 공포와 절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일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친구들과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갑자기 하늘이 피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의 붉게 물든 하늘은 마치 피처럼 번져 있었고, 강물마저 불안하게 꿈틀대며 곡선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면, 우리는 어디선가 이미 만난 듯한 얼굴을 떠올립니다.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늦은 밤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표정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진 피로와 불안,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가 곧 그 얼굴입니다. 그것은 곧 ‘현대인의 정신적 유배’ 상태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해골처럼 일그러진 얼굴, 양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채 절규하는 모습은 보는 이를 떨리게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절규는 소리로 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더욱 두렵습니다. 소리 없는 절규, 들리지 않는 외침. 뒤편에서 무심히 걸어가는 두 인물은 절규하는 존재의 고독을 더욱 부각시키며, 현대 사회의 무관심과 소외를 상징합니다.

한국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절규는 ‘한(恨)’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그리움과 억울함,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탄식이 얼굴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구적 절망과 동양적 한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에는 체념과 더불어 언젠가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뭉크의 절규는 한층 더 직접적이고 날카롭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절망의 칼날처럼, 인간의 심연을 가차 없이 찌릅니다.

뭉크가 사용한 템페라와 파스텔 기법은 색감을 더욱 강렬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화면 전체에 스며든 죽음의 기운과 삶의 허무함.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절망적 표현 자체가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절규할 수 있다는 것,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음의 증거이니까.

이 작품은 19세기 말 급속한 근대화와 도시화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정신적 위기를 상징한다. 그런데 21세기인 지금도 이 그림이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인간의 근본적 고독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