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邊時志) – 시대의 경계에 선 이름⟫
그는 중심이 아니었다.
변두리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바람과 흙의 숨결이 있었다.
붓을 들고,
말을 삼키고,
오랜 침묵 속에서
그는 시대를 가로질렀다.
1. 토착적 모더니즘의 선구자, 변시지
변시지(1926~2013)는 서구의 모더니즘 형식어휘를 제주라는 고유한 풍토 속에서 재해석하여, '토착적 모더니즘'이라는 독자적 미학을 확립한 화가입니다. 그의 예술 여정은 단순한 기법의 습득을 넘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편과 특수가 만나는 경계에서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창조해낸 치열한 탐구의 과정이었습니다.
20세기 한국 화단이 서구 모더니즘의 이식과 전통의 계승 사이에서 방황할 때, 변시지는 제3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것은 외래 양식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도, 전통에 안주하지도 않는, 풍토와 정신이 만나 생성되는 고유한 조형성의 발견이었습니다.
2. 유학과 근대적 감성의 형성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서양화의 기초를 닦고, 도쿄 시절에는 아카데미즘과 후기인상파, 광풍회전 수상 경험을 통해 근대 회화 문법을 섭렵했습니다. 이 시기 변시지에게 일본은 단순한 유학지가 아니라, 서구 모더니즘과의 첫 번째 조우이자 동시에 식민지적 근대성의 모순을 체감하는 복합적 공간이었습니다.
오사카와 도쿄에서 그는 세잔, 고갱, 마티스의 색채와 야수파의 해방적 붓터치를 익혔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내면과 기억 속 풍경과는 다른 언어임을 깨달았습니다. 광풍회전에서의 수상은 그의 기량을 인정받는 계기였지만, 역설적으로 서구 양식의 모방을 넘어서야 한다는 자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제주에서 보여줄 독창적 화풍의 정신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3. 덕수궁 비원에서의 한국적 자연미 탐구
1957년 귀국 이후 서울 덕수궁 비원을 오랫동안 그리며 한국적 자연미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에게 '회화적 귀향'의 과정이었습니다. 비원의 고목과 연못, 돌담과 기와는 서구적 원근법과 명암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고유한 공간감과 시간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덕수궁 연작에서 변시지는 동양 고전 회화의 여백 개념과 서구 인상주의의 순간 포착 의지를 결합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나무의 가지들은 먹선의 율동성을 닮아갔고, 연못의 수면은 빛의 떨림보다는 정적인 명상의 공간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제주의 풍토를 회화 언어로 번역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4. 1975년, 제주 정착과 예술적 대전환
1975년 제주 정착은 그의 예술 세계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단순한 거주지 이전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선택이었습니다. 50세에 가까운 나이에 서울 화단을 떠나 변방의 섬으로 향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제주의 자연은 그에게 전혀 다른 조형적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현무암의 거친 질감,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수평선, 오름들의 완만한 곡선, 그리고 사계절 내내 불어오는 바람의 움직임—이 모든 것들이 그의 화면 위에서 새로운 조형 언어로 변환되기 시작했습니다.
5. 황토와 먹선이 직조하는 조형 세계
화면은 황토색 바탕 위에 거칠고 매트한 질감을 얹고, 먹선처럼 유연하면서도 단호한 필선이 해안선·말·해녀·초가의 형상을 단순화해 새겼습니다. 이러한 화법은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화 과정과는 다른 독특한 길을 보여줍니다. 그는 대상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그 본질적 특징만을 남겨두는 '선택적 환원'의 방법을 취했습니다.
황토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제주 땅의 기억이었습니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토양의 색깔이자, 초가집 벽면의 색이며, 해 질 무렵 섬 전체를 물들이는 빛의 색이었습니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먹선은 동양화의 전통적 선묘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서구 회화의 윤곽선과는 다른 생명력과 호흡을 담고 있었습니다.
6. 절제와 환원의 미학
색은 절제되고, 형태는 기호화되었으며, 여백은 바람과 빛의 흔들림을 담아냈습니다. 이 환원과 절제의 과정은 단색화의 보편 추상과는 다른 길, 즉 구상적 표징을 남긴 채 장소성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길이었습니다.
변시지의 절제는 단순함을 위한 절제가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생략이었습니다. 해녀의 형상에서 불필요한 세부는 과감히 제거되었지만, 그 노동의 강인함과 바다와의 일체감은 더욱 강렬하게 부각되었습니다. 제주 말의 형태는 단순화되었지만, 그 야성과 자유로움은 오히려 증폭되어 표현되었습니다.
7. 풍토를 통한 조형 철학의 구현
그에게 '풍토'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형식을 생성하는 원천이었습니다. 『예술과 풍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연은 모방이 아닌 창조의 정신을 자극하는 주체였습니다. 이는 서구 모더니즘이 자연에서 멀어지려 했던 경향과는 정반대의 태도였습니다.
변시지에게 풍토란 단순히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화가의 정신과 감성을 형성하는 근본적 조건이었습니다. 제주의 바람은 그의 붓터치의 리듬이 되었고, 화산섬의 지질학적 특성은 그의 색채와 질감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해녀들의 삶의 방식은 그의 조형 언어의 정신적 뼈대가 되었습니다.
8. 역사와 삶의 감각을 담은 무서사적 표현
변시지의 작업은 제주의 지질과 기후, 노동과 기억을 화면에 기입함으로써, 역사와 삶의 감각을 무서사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이야기나 사건이 드러나지 않지만,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삶의 질감과 정서가 스며있습니다.
이는 민중미술의 직접적 메시지나 추상표현주의의 개인적 감정 분출과도 다른, 제3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체험, 역사적 의식과 순수 조형 의지를 절묘하게 균형지으며, 한국 현대미술의 독특한 지평을 열어놓았습니다.
9. 지역성과 보편성의 변증법적 통일
그 결과,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가설을 입증하듯, 그의 작품은 스미소니언 한국관 등 국제 무대에서도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는 변시지가 제주라는 특수한 장소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보편적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국제적 인정은 그의 작품이 단순히 한국적이거나 제주적인 것을 넘어, 인류 공통의 미적 체험과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변시지의 화면에 흐르는 바람과 빛,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특정 지역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에 대한 성찰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변시지는 20세기 후반 한국 미술사에서 서구 모더니즘도 전통 회화도 아닌, 제3의 길을 개척한 독창적 화가로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