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존재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조건이다."
— 메를로-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변시지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화면 어디에도 바람 그 자체는 없다. 황토빛 캔버스 위에 바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물질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을 본다. 소나무가 한쪽으로 휘어지고, 초가지붕의 이엉이 들썩이며, 까마귀떼가 비스듬히 날고, 사내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주체의 존재를 우리는 분명하게 감각한다.
이것은 단순한 회화적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변시지는 바람이라는 비가시적 존재를 역동적인 곡선과 사선으로 시각화했지만, 그 시각화의 방식이 독특하다. 그는 바람을 직접 그리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바람이 건드린 것들, 바람에 의해 변형된 세계를 통해 바람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의 근거가 되는 사태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를 구분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나무, 바위, 사람, 집—은 모두 존재자다. 그것은 보이고, 만져지고, 이름 붙여진다. 반면 존재 자체는 그 어떤 존재자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근거이면서도,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존재의 망각'이라 불렀다. 우리는 눈앞의 사물들에 매몰되어, 그 사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근거를 잊어버린다.
변시지의 바람은 정확히 이 존재론적 구조와 닮아 있다. 캔버스 위의 소나무, 까마귀, 조랑말, 초가집, 사내—이것들은 모두 존재자다. 보이고, 형상을 갖추고, 이름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존재자를 지금 이 상태로 있게 하는 힘, 나무를 휘게 하고 새를 날리고 사내의 등을 구부리게 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 바람은 변시지 회화에서 존재의 자리에 놓여 있다.
변시지의 바람은 자신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타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소나무의 기울기가 바람의 방향을 말해주고, 까마귀떼의 비행 각도가 바람의 세기를 알려주며, 초가지붕의 떨림이 바람의 리듬을 전해준다. 변시지 회화에서 바람은 일종의 '부재하는 중심'이다. 화면의 모든 것이 바람을 가리키지만, 바람 자체는 화면의 어디에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간접적 현시의 방법론은 동양 미학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노자는 말했다.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大象無形).' 진정으로 거대한 것,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감각에 잡히는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변시지의 바람은 이 무형(無形)의 대상(大象)이다. 동양 산수화의 전통에서 바람을 그리는 일은 늘 이러한 역설 위에 서 있었다. 바람 부는 대나무, 바람에 일렁이는 수면,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 가지—화가들은 항상 바람이 아니라 바람의 흔적을 그렸다. 그러나 변시지의 독창성은 이 흔적의 규모에 있다. 동양 전통의 화가들이 대나무 한 그루나 수면 한 조각에 바람을 담았다면, 변시지는 화면 전체를 바람의 장(場)으로 만들었다.
황토색으로 균일하게 칠해진 캔버스의 모든 곳에서 바람은 작용한다. 수평선이 흐려지고, 원경과 근경의 경계가 사라지며, 모든 사물이 하나의 대기 속에 용해된다. 이것은 바람이 부는 풍경이 아니라, 바람 자체가 곧 풍경인 세계다. 관람자는 그림 밖에서 바람 부는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휘몰아치는 바람의 한가운데로 초대된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서양적 공간관이 여기서 무력해지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동양적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가 열린다.
변시지의 바람이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실존적 힘을 갖는 것은, 그것이 제주라는 구체적인 풍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는 삼다도(三多島)—바람, 돌, 여자가 많은 섬—라 불린다. 여기서 바람은 추상적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초가지붕을 날리고, 배를 뒤집고, 들판의 곡식을 쓰러뜨리는 생사의 힘이다. 제주 사람들은 바람과 더불어 사는 법을 삶으로 배워야 했다. 돌담이 구멍을 남기면서 쌓이는 이유는, 바람을 막되 바람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다. 바람을 완전히 차단하면 돌담 자체가 무너진다. 틈을 내어 바람이 지나가게 하되, 그 세력을 누그러뜨리는 것. 이것이 제주적 지혜이며, 변시지 회화의 존재론적 태도이기도 하다.
변시지는 1975년 제주에 귀향한 후 거의 40년간 이 바람 속에서 살았다. 그에게 바람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었다. 그가 말했듯, "내 작품에서의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속 저항"이기도 했다. 바람은 기상(氣象)이면서 동시에 심상(心象)이었다. 바깥에서 부는 물리적 바람과 안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격동이 그의 캔버스 위에서 구분 불가능하게 뒤섞인다.
여기서 변시지의 바람은 와쓰지 데쓰로가 『풍토(風土)』에서 말한 '풍토적 자기 이해'의 차원으로 깊어진다. 와쓰지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환경을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하기에 앞서, 풍토 속에서 이미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추위를 느끼는 것은 온도계의 눈금을 읽는 것이 아니라, '추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주의 바람은 측정 가능한 풍속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 속에 던져진 나'를 발견하는 경험이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바람에 맞서 구부린 사내의 모습은 바로 이 풍토적 자기 발견의 형상화다. 사내는 바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내는 바람 속에 있다. 바람이 사내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규정하고 있다.
변시지가 바람을 형상화하는 핵심 도구는 검은 선이다. 황토색 바탕 위에 유화 물감의 기름기를 뺀 뻑뻑한 붓으로 긋는 이 선들은, 서양의 데생적 윤곽선도 아니고 동양의 정교한 백묘법(白描法)도 아니다. 그것은 서예적 필법에 가까운 '쓰기(Écriture)'다. 변시지의 검은 선은 사물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힘과 방향과 리듬을 기록한다.
갈필(渴筆)로 그어진 이 선들에는 붓이 캔버스를 스치며 남긴 물리적 흔적이 살아 있다. 물감이 고르게 발리지 않고 군데군데 끊기며 거칠게 질주하는 이 선의 궤적은, 바람이 대지를 쓸고 지나가는 방식과 동형(同形)이다. 바람이 만물을 고르게 건드리지 않듯, 변시지의 붓도 캔버스를 균일하게 덮지 않는다. 여기에 바람의 진실이 있다. 바람은 고른 것이 아니라 거친 것이며,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돌발적인 것이다. 변시지의 갈필은 이 진실을 물감의 물질성으로 체현한다.
데리다가 에크리튀르를 음성 중심주의(logocentrism)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다면, 변시지의 에크리튀르는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이다. 회화가 오로지 보이는 것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통념에 맞서, 변시지는 보이지 않는 것의 흔적을 써넣는 행위로서 그림을 재정의했다. 그의 검은 선들은 서양의 데생이 아닌, 바람의 서사를 기록하는 에크리튀르다. 이 선들은 무엇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의 사건을 증언(testimony)한다.
결국 변시지의 바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미학적인 동시에 존재론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이 물음은 바람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고독, 슬픔, 기다림, 그리움, 저항—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아니, 보이는 것들보다 더 근원적으로 존재한다.
변시지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형상을 부여하되, 그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슬픔을 눈물로 그리지 않았고, 고독을 빈 방으로 그리지 않았으며, 저항을 주먹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바람에 맞서 구부러진 등, 한쪽으로 기운 소나무, 비스듬히 나는 까마귀로 이 모든 것을 말했다. 직접 말하지 않고 말하는 것,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것이 변시지 예술의 방법론이자 윤리다.
그의 화면에서 바람은 절대로 형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아, 보이는 모든 것을 움직인다. 이것이야말로 변시지 회화의 존재론적 핵심이다. 존재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보이는 것 어느 하나 존재할 수 없다. 변시지의 바람은 이 진실을 황토빛 캔버스 위에서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다.
바람은 여전히 분다. 변시지가 떠난 뒤에도 서귀포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캔버스 위에서도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채로, 영원히, 화면의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한다. 변시지의 바람은 그래서 단순한 모티프가 아니라 그의 예술 전체를 관통하는 존재론적 원리다. 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부재하면서 편재하는 것, 형상 없이 모든 형상을 결정하는 것. 그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이것이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나무가 휘어지고 사내의 등이 굽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안다. 변시지의 그림에서 가장 강한 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